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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마    
글쓴이 : 윤기정    22-04-03 01:29    조회 : 3,723

고구마

윤기정

 

 

갓 구워낸 고구마를 양손에 옮겨 쥐어가며 껍질을 벗긴다. 뜨거운 김을 불어낸다. 잇몸을 한껏 드러내면서 앞니로 노란 속살의 열기를 가늠한다. 뜨거움이 앞니 끝에서 온몸으로 번진다. 베어 문 군고구마 한 조각의 열기와 밀고 당기느라 입술과 혀와 이, 벌름대는 콧구멍까지 바쁘다. 얼굴도 벌겋게 달아오른다. 군고구마 한 입 먹기가 만만치 않다. 온 신경을 일으켜 세워 뜨거움과 체온이 조화를 이루는 지점을 찾아야 한다. 우스꽝스러운 행동이지만 뜨거울 때 더 맛있으니 참아낼 일이다.

동생이 하나였을 때다. 여닫이문을 열어젖힌 작은 방 문지방에 나란히 붙어 앉았다. 비가 내린다. 좁은 툇마루를 건너 먼지 같은 빗물 방울이 날아들기도 하는 그런 비다. 엄마는 툇마루 밑의 아궁이에서 얇게 썬 고구마를 부쳤다. 엄마 등에서는 하얀 김이 오른다. 툇마루에 놓인 접시에 부친 고구마를 담아주려고 허리를 펼 때만 엄마 얼굴을 볼 수 있다. 나이테 흐릿한 툇마루, 접시와 고구마, 엄마와 동생과 나 그리고 내리던 비와 오르던 김이 양철 챙을 두드리던 빗소리와 함께 비스듬히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그림처럼 떠오른다. 인생 첫 고구마는 미각이 아닌 시청각으로 남았다.

지우고 싶은 고구마의 기억도 있다. 아버지는 운전사였는데 나이 들면서 운전 사고가 잦아졌다. 사고를 낼 때마다 집은 작고 허름해졌다. 기억 속의 첫 번째 집은 목욕탕도 있었다. 청구동 집은 마당에 해종일 햇빛이 놀았고, 약수동 집은 마당에 우물이 있는 자형의 어두컴컴한 집이었다. 다음 집은 그 동네의 루핀 얹은 무허가 판잣집이었다. 그리로 이사하고 나서는 우물집 앞을 지날 때면 외면하고 다녔다.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는 일도 줄였다. 청구동 집이 판잣집이 될 때까지 6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 사이 동생은 셋이 되었다. 중학교 2학년 때 판잣집을 헐고 새 집을 짓기 시작했다. 헐어낸 집터 한 귀퉁이에 임시로 방 한 칸을 들였다. 여러 식구가 북적여도 새 집에 대한 기대로 집안, 아니, 방안에는 웃음이 넘쳤다. 그때만 해도 집이 지어질 때까지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고, 많은 일이 일어날 줄을 몰랐다. 그 겨우내 고구마로 끼니를 때울 줄도 그때는 알 수 없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모습을 갖춰가던 집이 사라졌다. 마당귀에 어깨 처진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였다. 바람 한 줄기가 먼지를 날리며 아버지의 어깨를 짚고 지나가고 있었다. 얼마 뒤 공사는 다시 시작되었고 늦가을 전에 집이 지어졌다. 아버지가 구청을 몇 차례 드나들었고, 어머니가 일숫돈 얻는 것을 두 분의 대화로 짐작할 뿐이었다. ‘와이로라는 말도 몇 차례 들었다. 집이 완성될 무렵 아버지의 마지막 교통사고가 터졌다. 아버지는 합의 대신에 재판을 받아들였다.

그해 겨울은 길고 추웠다. 어머니는 안방 세놓은 돈으로 피해자와 합의했다. 우리 식구는 다시 건넌방 하나에 모였다. 어머니는 피해자 만나랴, 아버지 면회 다니랴 몇 년 전부터 시작한 과일 장사를 못하는 날이 많았다. 동네 큰집 담벼락에 부스럼처럼 붙은 싸구려 빵집에서 만든 밀가루만 크게 부풀린 빵이 아침인 날이 많았다. 도시락 대신에 삶은 고구마 두어 개를 누런 봉투에 담아 간 날도 있었다. 저녁은 삶은 고구마였다. 멀건 김칫국으로 목을 축이며 삶은 고구마를 삼켰다. 이듬해 봄 집행유예로 풀려난 아버지가 돌아왔다. 고구마는 구황식품임을 깨달은 것이 생애 두 번째 고구마의 기억이다.

기술자로 월남 갔던 아버지가 다시는 사고 낼 수 없는 영혼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가 바람 견디며 뒷모습으로 섰던 마당귀 너머 바깥 공터로 방 하나를 달아내어 안채는 팔고 그리로 나앉았다. 가게 한 칸도 덧붙였다. 방도 가게도 무허가였다. 가게에서 군것질거리를 팔았다. 여름에는 아이스케이크, 겨울에는 군고구마도 팔았다. 어머니가 중부시장에서 떼어서, 머리에 이고 장충단 고개를 넘은 과일도 팔았다. 밤늦게 어둠 스미듯 가게에 들어서면 어머니는 남겼던 과일이나 군고구마를 내밀었다. 도리질하며 거부했다. 오래도록 고구마를 잊으며 살았다. 궁핍의 기억과 자동 연결되는 고구마 따위는 쳐다보고 싶지 않았다. 고구마는 의식의 밑바닥에서 떠올라서는 안 되는 어떤 것이 되어갔다.

어머니는 생전에 고구마를 좋아했다. 아내가 군고구마를 사 들고 온 어느 겨울 저녁에 식구들이 고구마 봉지를 펼치고 앉았다. 어머니의 눈꼬리에 웃음이 걸렸다. ‘아범아. 이 고구마가 우리 살렸지 않니?’ 군고구마를 좋아하신 까닭이 치아가 부실해서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그 겨울의 고구마는 가슴 에는 모정이었다. 한 개 집어 들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철없던 날들, 어머니 가슴에 마구 그어댄 생채기가 아른거렸다. 입가에 미소를 슬쩍 흘리는 것으로 암요답했다. 기다렸던 것처럼 고구마와 화해했다.

아득한 기억 속의 빗줄기와 툇마루와 고구마, 젊은 날의 엄마 얼굴을 바라보다가 덜 식은 고구마를 한 입 베어 물었다. ‘, 뜨거!’ 아내가 놀란 눈으로 쳐다본다. 창밖으로 눈길을 돌리며 소리 죽여 웃는다. 소쿠리에 둘러앉은 동생들이 삼십 촉 불빛 아래서 소리 내어 웃고 있다. 불빛과 어둠의 경계쯤에서 어머니가 소리 없이 웃고 있다. 잊으려 할수록 속으로 차오르는 그리움도 있다.

 <한국산문> 202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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