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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 갈피에 끼우다 <꽃들의 체온 > 2022년 동서문학회 동인지 발표    
글쓴이 : 최선자    22-06-08 12:30    조회 : 5,417

                     세월, 갈피에 끼우다

                                          최선자


굴레인가, 마음의 지주였던가. 홀가분하지도 서운하지도 않은 미묘한 기분이다. 사십삼 년 만에 차례상 없이 맞는 설날이다. 친정에서 본 차례상까지 합하면 육십 년도 넘는다. 다섯 시 반에 일어나 아침 내내 서재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다. 내가 잘한 일일까? 잠깐 혼란스럽다.

  시부모님은 뵌 적이 없지만, 남편이 떠난 지 십 년째다. 아직 빠르지만 과감하게 차례와 제사를 접기로 했다. 직장생활에 살림까지 항상 동동거리는 딸들을 보면서 며느리한테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ㅡ네가 결혼하면 명절에 처가에 가든 여행을 가든 상관하지 않겠다. 너희들 편한 대로 해라.

  예전에 두어 번 말했다. 효자인 아들은 대답이 없었다.

  내가 살아생전에는 제사를 모시려고 했다. 하지만 아들이 혼기가 차자 생각이 바뀌었다. 명절에 차례를 모시지 않으면 처가나 여행을 간들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 같았다. '미리 끊어주자.' 자식들 처지를 생각하고 결정했다. 남편은 화를 낼지도 모르지만, 시부모님은 섭섭하지 않으시리라 믿는다. 대개 조부모님의 손주 사랑은 넘치니까. 아들은 내 건강 때문으로 알고 반대하지 않았다.

  친정엄마는 명절 차례상까지 합하면 일 년에 아홉 번의 제물을 장만했다. 자주 보고 자라서인지 차남인 남편이 시부모님 제사를 모시겠다고 했을 때 순순히 따랐다. 나는 자영업을 했다. 제삿날 가게가 바쁘면 어려서부터 두 딸이 전유어는 도맡다시피 해주었다. 명절에는 새벽까지 음식을 장만한 적도 있다. 그럴 때는 솔직히 제사에서 놓여나고 싶었다.

  조상을 섬길 줄 모르는 건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즘 젊은 사람들은 핵가족 속에서 자란 이들이 많다. 그만큼 제사를 많이 접해보지 않았을 게다. 거기에 학창 시절부터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자랐다. 제사음식은커녕 평소 먹는 반찬도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인스턴트식품이 마트 진열대에 즐비하고 반찬가게가 늘어난다. 주부가 직장인으로 시간에 쫒겨 어쩔 수 없이 이용할 수도 있다. 음식을 만들어 끼니도 해결하기 힘들다면 그만큼 제사는 부담이지 않을까?

  정성을 다한 제사. 친정부모님은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도 제물은 상품으로 준비했다. 아버지는 한복을 갖추어 입고 지방을 썼다. 아무리 바빠도 고명까지 얹으며 음식을 장만하던 친정엄마. 나는 겨우 흉내 냈지만, 며느리에게 바라는 건 무리다. 제사음식 대행업체를 이용할 수도 있다. 그렇게 까지 하면서 제사를 모시라고 강요하고 싶지 않다.

  음식 맛은 정성이라고 생각한다. 손맛이라는 건,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손끝으로 흘러나와 양념에 더해진다. 그래서 반찬을 사서 먹지 않는다. 하물며 제사음식에 후손의 정성이 들어가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주관적인 판단이니 반론을 제기하면 할 말은 없다.

  자식들에게 마지막까지 짐을 지워주고 싶지 않았다. 예순 세 살에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신청했다. 자녀들이 바꿀 수도 있다기에 등록증 사진을 찍어서 가족 단톡방에 올렸다. 존엄하게 죽고 싶으니 엄마 뜻대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삼 남매가 몇 시간 동안 답이 없었다. 갑자기 등록증 사진을 보고 착잡했으리라. 큰딸이 나서서 말씀대로 하겠다고 답글을 올렸다. 친구는 백세시대에 벌써 그런 걸 하냐고 말했다. 남편을 보내고 연이어 손아래 남동생이 췌장암으로 떠났다. 멀리 있다고 느꼈던 죽음이 아주 가까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 깨달음도 제사를 접는데 한몫 거들었다.

  친정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엄마가 돌아가시자 제사를 하루에 다 모시자고 했던 아버지. 나는 다른 분은 몰라도 엄마까지 그럴 수 없다고 반기를 들었다. 그때 말씀 하셨다.

  ㅡ니가 와서 할래? 며느리들이 직장에 나가는데 누가 음식을 장만하겠냐?

  더는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그 뒤 친정 제사는 하루에 모시게 됐다. 엄마 제삿날 간단하게 제물을 준비해서 가지고 친정에 갔다. 아버지는 첫 기일인데 제사를 모시지 않는 게 서운하셨는지 좋아하셨다. 삼 년이 지나자 동생들이 부담스러운 눈치여서 그만 두었다. 시누이를 돕지 못하는 올케들 마음이 편하지 않았으리라. 제삿날 산소에 가서 제물을 올리던 친정 제사는 나중에 추도예배로 바뀌었다. 아버지는 자식들이 거의 기독교 신자여서 반대하지 않았다.

  지금은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안 계신다. 여전히 친정 제삿날은 형제들이 모여 추도예배를 드린다. 부모님 묘소 앞에 돗자리를 펴놓고 앉아서 추억에 빠져 이야기꽃을 피운다. 아버지 애창곡이었던 노래를 며느리들까지 돌아가면서 불러드린 적도 있다. 당신이 떠나도 변함없이 우애하라고 자주 말씀하셨던 부모님은 자식들 모습에 흐뭇하셨으리라 믿는다.

  며느리들도 김밥을 싸서 들고 즐겁게 모이는 소풍 같은 제삿날. 나도 아버지를 닮고 싶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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