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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숨    
글쓴이 : 박소현    22-06-12 23:08    조회 : 5,215

물숨

  

  등에 진 망사리가 삶의 무게만큼이나 힘겨워 보인다. 화면 가득 클로즈업 되는 해녀들의 고통스런 얼굴과 "호오~이, 호오~이" 정적을 깨는 처연한 소리, 소리들. 저들은 얼마나 많은 자맥질과 숨비소리를 토해 내고서야 순명처럼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한글보다 물질을 먼저 배웠다는 영상 속 해녀들의 일생이 애잔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제주를 여행하면서 '해녀 박물관'을 찾은 건 순전히 작년에 보았던 다큐멘터리 영화 『물숨』때문이었다. 한 번도 제주 바다를 떠나본 적이 없었다던 86세 고창선 해녀 할머니의 죽음, 그녀의 굽은 등과 애달팠던 생이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서이다. 우도 해녀들의 삶과 죽음을 7년 동안 기록한 이 영화는 그동안 내가 몰랐던 해녀들의 생활이 찡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숨을 멈춰야만 살 수 있는 여인들이 있다. 태왁과 망사리를 등에 지고 변변한 장비도 없이 맨 몸으로 바다로 뛰어드는 사람들, 제주의 상징 해녀들이다. 바다 속에 들어간 그들은 7, 8시간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수없이 많은 자맥질을 반복한다. 극한의 순간까지 숨을 멈춘 채 소라, 전복, 문어, 해삼 등을 건져 올린다. 그들이 숨을 참은 대가는 가족들의 생계가 되고 자식들의 미래가 된다.

  해녀들에게는 숨을 참을 수 있는 시간에 따라 상군, 중군, 하군으로 나눠진 자신들만의 계급이 있다. 숨의 길이는 선천적으로 타고 나는데 아무리 노력을 해도 그 한계를 뛰어 넘을 수는 없다고 한다. 세상에! 노력해도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라니? 그래서 처음 해녀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는 건 자신의 숨만큼만 해산물을 따서 재빨리 물 위로 나오라는 것이라고 한다. 부질없는 욕심을 경계하라는 경고일 터이다.

  해녀들은 자신의 한계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 사실을 잊은 채 더 많은 해산물을 채취하기 위해 시간을 지체 하다가는 '물숨'을 먹고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다. 물숨은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고 자신의 숨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 물을 들이켜 목숨을 잃게 되는 숨을 말한다. ‘숨비’가 극한의 순간에 토해내는 생존의 숨이라면 물숨은 더 참을 수 없어 들이마실 수밖에 없는 죽음의 숨이다.

  무엇이 그녀들을 바다로 뛰어들게 하는 것일까?

  "내 그 아들 학비 대느라 참 힘들었시다."

 

  딸 4명에 아들 하나를 두었다는 고계원 할머니는 물질로 아들을 외국 유학까지 시켰다며 힘겹게 살아온 지난날을 이야기 한다. 열일곱 어린 딸을 바다에 바친 할머니도 있었다. 미역에 발이 걸려 물숨을 먹었던 그녀의 딸은 꿈도 펼치지 못한 채 바다에 넋을 묻고 말았다.

  자식들이 떠난 빈자리, 이젠 노쇠해 더 이상 물질이 힘든 늙은 해녀는 가물거리는 기억 속에서도 가슴속에 옹이로 남은 피붙이를 그리워한다. 한 공기의 따뜻한 밥과 뭍으로 보낸 자식들을 공부시키느라 그녀들은 전사처럼 더 깊은 바다로 뛰어들었을 터이다.

  상어에게 몸뚱아리를 먹혀 살려달라 비명을 지르는 동료를 보면서도 자신의 목숨 보전을 위해 탈출할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사연에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느 험준한 골짜기를 헤매다 온 바람처럼 해녀들의 몸에 새겨진 거친 생존의 무늬들. 그녀들이 토해낸 설움들을 껴안아 주느라 바다는 저렇게도 울부짖고 있는 것일까? 포구엔 먹이를 찾아 모여든 갈매기들의 군무가 황홀하다. 저들도 생존의 한 가운데에서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이 바다를 찾았으리라.

  삶은 고해라고 했던가. 얼마나 많은 시름들이 그녀들의 가슴에 머물다 간 것일까. 힘겨운 삶의 파도를 헤쳐 온 그녀들의 이야기가 내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숙소로 들어오는 길에 해산물을 다듬던 한 해녀 할머니를 만났다. 석양이 내려앉던 제주의 그 바닷가에서 가쁜 숨소리를 고르며 들려주던 그녀의 긴 인생사. 바다에 남편과 아들을 바쳤다는 할머니는 수장된 기억들을 떠올린 듯 긴 한숨을 쉬었다. 덧없이 가버린 세월을 원망이라도 하려는 듯이….

  돌 틈 사이로 날아든 바람이 할머니의 숨비소리인 양 구슬프다. 피안의 세계로 가 버린 고창선 할머니의 넋은 바다가 되었을까? 서른한 살에 남편을 잃고 바다를 남편 삼아 억척스레 4남매를 키웠다던 그녀. 그렇게 말렸건만 자신을 따라 해녀가 되었다던 셋째 딸의 절규와 ‘물혼굿’을 하던 장면이 생생하다. 물혼굿은 바다에서 죽은 사람의 혼을 건져 올려 위로하고 다시 바다로 보내는 의식이라 한다.

  내면의 상처가 깊은 사람은 더 깊은 동굴 속으로 침잠한다. 우리는 손 안에 그 무언가를 더 많이 움켜쥐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숨을 참으며 견뎌냈을까. 어떻게 해야만 그것들을 온전히 내려놓을 수 있을까. 삶이란 어쩜 모범답안을 찾지 못한 시험 같은 게 아닐까? 나는 오늘 이 바다의 품에 안겨 깊은 잠에 빠져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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