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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아 주세요    
글쓴이 : 노정애    12-05-16 19:04    조회 : 5,869
 
안아 주세요 

                                                               노 문 정 (본명:노정애)

 인파로 넘쳐나는 명동거리 한 복판에서 말쑥한 청년이 ‘누구든 안아 드립니다’라고 쓰인 커다란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는 아담한 키에 맑은 눈빛을 가졌다. 따뜻한 미소를 모두에게 보내는 청년은 세상 누구보다 커 보였다. 칼바람 추위도 막아주는 고향집 사랑방의 화롯가처럼 그의 따뜻한 마음도 모두를 보듬을 것 같았다. 중년의 부인이 추운데 고생한다며 아들을 안아주듯 다정하게 안았다. 포옹하는 사람보다 구경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동방예의지국에서 뭐하는 짓이냐며 혀를 차는 할아버지도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의 마음을 안기 위해 서 있는 모습이 내 눈에는 예쁘게만 보였다. 나도 안기고 싶었지만 옆에 있던 지인의 “주책”이라는 비난에 기가 죽어 포옹은 불발로 끝났다. 
  몇 해 전 호주 시드니에서 시작했다는 ‘프리 허그(Free-Hugs)운동’이 이제는 세계인의 운동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이들이 참여해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는 자주 볼 수 있다. 모르는 사람을 안는다는 것은 보수적 성향이 강한 우리에게 무척이나 낯간지러운 일이다. 개방문화를 가진 서양에서도 포옹이란 친한 사람들이 오랜만에 만날 때 하는 인사법이라 겸면적기는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러나 상대에게 위로, 희망, 따듯함을 전하기에 허깅 만큼 좋은 것이 있을까? 그것도 공짜로 안아준다고 하지 않는가. 실제 이 운동에 참여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을 보듬으면서 정작 자신들이 더 많은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미국의 심리상담자인 캐서린 키팅이 “포옹은 단순히 껴안는 행위를 넘어 치유의 과학이며 인생의 예술”이라고 극찬했나 보다. 
 포옹할 때 몇 가지만 유의하면 된다. 나와 상대가 허깅 한다는 충분한 신호를 준다. 팔을 벌리고 어깨를 기울인다. 엉덩이를 뒤로 조금 빼고 팔로 살며시 등을 감싼다. 따뜻함을 교환한 뒤 등을 가만히 쓸어준다. 통계에 의하면 등을 두드리는 것은 서양인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등을 문지르는 것은 대부분 좋아한다고 한다. 동성애자로 오해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동성 간의 포옹에서는 서로의 엉덩이를 30cm정도 떨어지게 하는 것이 좋다.
  청소년 폭력의 심각성을 우려하는 기사를 읽었다. 학교폭력이 나날이 증가해 위험수위를 넘었다고 한다. 그 원인은 유년기와 소년기의 성장환경에서 애정결핍, 불안정 등 심리적 문제가 가장 큰 영향을 준다고 한다. 생후 18개월까지는 피부접촉을 제대로 받아야 정서적으로 안정되게 자랄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해서란다. 많이 안아주는 것이 이러한 요인들을 예방하고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했다. 신체접촉이 부족한 문화권일수록 폭력발생률이 높다는 연구결과를 보면 안아주기가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긴장과 스트레스를 풀어 주고/행복감을 키워 준다./절망을 물리쳐 주며/당신의 눈을 빛나게 하고/스스로 당신 자신을 존중하게 해 준다./감기, 얼굴에 난 종기, 골절상에도 효과가 있으며/불치병까지도 극적으로 낫게 한다./이 약은 특히 가슴에 난 상처에 특효약이다./이 약은 전혀 부작용이 없으며/오히려 혈액 순환까지 바로잡아 준다./이것이야말로 완벽한 약이다.

 잭 캔 필드, 마크 빅터 한센의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에 담겨있는 글이다. <만국 공통의 약 처방>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 약은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허깅(hugging)이다.
 퇴근하는 남편을 현관 앞에서 맞으며 안아준다. “힘들었죠”라며 등을 토닥인다. 잠깐 사이에 표정이 부드러워진 것 같다. 나의 착각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 순간 나의 힘든 하루도 위로 받는다. 12시가 넘어야 귀가하는 고등학생 딸아이를 안고 등을 쓸어주며 “수고했다”고 나지막이 속삭인다. 언제 이렇게 컸는지 아이가 나를 안은 것 같다. 이제야 제 둥지를 찾아 지친 날개를 쉬는 새처럼 안쓰럽다.  힘을 내라, 열심히 해라 등의 말은 필요치 않다. 잠시 서로의 따뜻한 체온만 느끼면 된다. 언니만큼 바쁜 하루를 보낸 중3의 작은 딸 아이가 나를 안아주며 “감사합니다”라고 말한다. 필시 자신보다 못한 아이들을 보았거나 이야기를 들어서일 것이다. 생각의 키가 한 뼘은 큰 것 같다. 하루를 잘 보낸 것을 감사하며 우리가족은 서로를 보듬는다.
  7년째 알츠하이머를 앓고 계시는 시어머니. 연중 길게는 몇 달, 짧게는 며칠을 우리 집에서 지내신다. 단아한 외모, 대쪽 같은 자존심, 깔끔한 살림 솜씨를 자랑하던 모습은 먼 과거가 되었다. 머릿속 기억도 아득한 과거에만 머물러 계신다. 세월이 만든 상처가 한으로 남아서일까? 가끔씩 목에 푸른 핏대를 세워가며 고함을 지르고 답답한 가슴을 어쩌지 못해 북 두드리듯 자신의 가슴을 치신다. 이럴 때 ‘가슴에 난 상처에 특효약’이라는 ‘안아주기’가 필요하다.
 숨 고르시는 찰나를 잡아 “어머니, 한번만 안아 봐도 되요”라며 조심스럽게 안는다. 오랜 병마에 시달려 앙상한 뼈만 남은 작은 몸은 내 가슴속에 다 담겨진다. 피부가 닿으면 애정호르몬이라는 옥시토신이 분비되는데 이때 뇌가 알파파를 생성해 근육을 이완시켜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한다. 그때까지 3초 정도 기다린다. 신랑 품에 안긴 새색시처럼 얌전해진다.  가만히 머리와 등을 쓸어 드리고 우리가족 모두가 사랑한다는 말도 한다. 이것조차 어머니의 기억에서 연기처럼 사라지겠지만 말이다. 그 순간 내 마음도 편안해진다. 이 약의 효과는 빨리 나타나며 부작용이 없어서 더욱 좋다.
  언젠가 어머니를 안고 있는데 도리어 나를 안고는 등을 쓸어 주셨다. 그러면서 “나 때문에 힘들지. 고맙다.” 고 예전의 조용한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난 이 말만 가슴깊이 담아 두고 있다.
  자신을 안아주고, 가족을 안아주고, 이웃을 안아주자는 프리 허그 운동. 여기에 ‘주책’이 끼어들 틈은 없다. 지금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람에게 안아주고 싶다는 표현을 하고 그도 그러겠다는 의사를 보인다면 그냥 안으면 된다. 상대의 따뜻함이 느껴지면서 내 마음의 짐도 조금은 가벼워질 것이다. 그저 그 순간을 느끼기만 하면 된다. 


                                                                                 <책과 인생>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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