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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冊佛 앞에 서서    
글쓴이 : 유시경    22-06-19 00:13    조회 : 11,870

冊佛 앞에 서서


 그곳을 올려다본다. 기름과 숯가루와 육즙이 표지를 감싸고 있다. 몇 조각의 마늘과 양파와 고춧가루가 첨가된, 글 냄새가 아닌 야릇한 뭔가가 풍겨 나온다. 끈적이는 문장. 표현할 수 없는 자책감에 콧날이 시큰해진다.

 “여전히 쓰고 계신 거죠?”

 “책은 언제, 또 안 내시나요?”

 단골 몇 분 가운데 문학과 책 이야기를 건네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잃어가는 나의 세계에 쓰고자 하는 동기와 가능성을 부여한다. 채근하는 독자가 생긴다는 건 매일 한 도막의 어절이라도 끼적이지 않으면 안 되는, 잿더미에서 불씨를 솎아 내려는 강박과 같다. 나는 그들에게 계산대 뒤편 자그마한 책장에 꽂힌 책 몇 권을 선사하기도 한다. 식당 선반에 붙박여있는 발표작들을 내심 부끄러우면서도 철면피하게 내놓는 것이다.

 우리 가게를 찾아주는 손님들을 응당 감사하게 여기지만 더욱 고마운 건 내가 쓴 글을 읽어주는 독자와 함께 한다는 데 있다. 더욱이 과분한 것은 미숙한 문장들을 읽고 찾아와 기꺼이 식사비용까지 지불하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애초에 나는 카운터 선반에 무엇을 올려놓을 것인가에 대해 제법 사업가적인 생각을 내비친 적이 있다. 가령 남편이 경작해온 특수 작물이라든지, 요리 비책이 담긴 식품들을 진열하여 꽤나 짭짜름한 부수입을 올릴 수 있겠다는 발상이었다. 그러나 생각만 했을 뿐 우린 단 한 번도 가공된 먹거리를 포장해놓거나 팔아먹지 못했다. 대신 여러 문예지들을 아름드리 쟁여놓기로 한 것이다. 선반은 그로 인해 책들의 성지로 변모해갔다. 나는 손님들에게 내 글이 담긴 책을 서비스했고 남편은 자신이 지은 농산물을 나누었다.

 선반에 안착한 책들은 진정 거룩하였다. 저마다의 철학을 기록한 문장들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어 편안하고 행복했다. 그것을 바라보는 손님도 아름다웠으며 그것을 얘기하는 손님은 더욱 고귀해 보였다. 식욕이 품격을 충동질하는 느낌이랄까. 이를테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우아함같은.

 식당 여주인은 책 한 권을 식탁 위로 내려놓으며 지은이에 밑줄 긋고 제목에 별표한 뒤 귀퉁이를 살짝 접어 선물했다. 간혹 글이 감동적이라는 이도 있고 재미있다는 이도 있으며 변함없어 좋다는 이도 있었다. 숟가락을 내리고 잠자리에 들 때면 변함없어 좋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했다. 여전히 일하고 여전히 쓰며 여전히 서빙을 잘한다는 말인지, 그대는 아직도 젊다라는 의미인지.

 그로 인해 나는 살아있다라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으니 손님은 왕이 아닌 인문학적 동반자나 진배없다. 슬픈 건 그들의 인기척이 없을 때, 책장의 책들마저 세월의 더께가 앉아 식어빠진 고깃덩어리처럼 바싹바싹 말라 윤기를 잃어가는 현실이다.

 “불 들어갑니다.”

 무지렁이 중생은 어제도 오늘도 똑같은 구호를 외쳤다. 난 이 말이 그토록 외경畏敬한 뜻인지 미처 몰랐다. 법정스님 다비식茶毘式때 대나무 홰에 불을 켠 불자들이 스님, 불 들어갑니다.”라고 말하는 걸 보고 나서야 뜨끔하였다. 풀무질로 숯불을 붙여 양철통에 담아 불구멍에 넣기 전, 습관처럼 손님, 불 들어갑니다라고 수천 번도 넘게 외쳤으니 그 업보를 씻을 도리가 없다. 화염에 스러져 간 산야의 저 나무들이야말로 차라리 내 껍질을 벗기어 이 순간을 기록해다오!”라고 울부짖으며 인간의 과오를 탓했던 건 아닌지.

 불 들어와 앉는다. 책 냄새, 고기 냄새 무르익는다. 환풍기의 기름때와 함께, 밥상의 나뭇결과 함께, 톱밥 냄새와 함께. 익는다. 주방을 등진 위대한 책, 밥상의 상처를 포용하는 책. 계산대 뒷자리에 서서 주인의 하루를 인내하며 숨통을 닫고 자기를 익힌다. 낱장마다 기름에 찌들어 절박한 냄새로 곰삭는 책들. 어떤 쪽은 뭉개지고 어떤 면은 휘어진다. 어떤 책은 햇살에 빛바래고 어떤 책은 무심함에 얼룩진다. 나는 그것을 책의 형상을 띤 부처, ‘책불冊佛이라 하련다.

 고깃집 그 여자의 볼품없는 책장엔 기름옷 잘 입은, 스스로 구워지고 고뇌하는, 그러나 다비는 영원히 하지 않을 책불들이 있다. 초벌되어 나온 뒤 식당으로 들어와 또 한 번 몸부림하는, 환금성 없는 삶의 미세한 가치들. 불판 위의 고기와 함께, 객들의 주린 배와 함께 글판이 번진다. 그것은 지글지글 끓다가, 뜨겁게 그을리다가, 굳세게 버티다가 새로운 신도에게로 떠나갈 터이다.

 속장을 낱낱이 받치고 있는 등뼈는 책불의 심지. 넌 할 수 있어! 난 할 수 있다며, 죽을 힘 다해 꼿꼿이 서있는 책들은 무너진 내 척추의 재활을 신뢰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이 관념의 정수리에 놓인 빈 그릇일지언정, 혹여 헛배에 게트림이거나 공염불일지라도 이런저런 고민조차 하지 않는다면 쇠약해지는 하루를 견뎌내기 어려울 것이다.

 책불 앞에 빌어본다. “불 들어갑니다라는 말 대신 책 들어갑니다라는 구호가 이 삶을 대체하는 문장이 되길. 오늘도 내일도, 익어가는 시간마다 책 들어오기를.

 - 2022좋은수필》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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