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실험
‘그릇을 깨면 나쁜 일이 생긴다.’ 나의 징크스였다. 과학적 근거가 없는 추측이나 주장은 불신하는 편인데, 이상하게도 여기서는 벗어날 수가 없었다. 시작이 언제였을까. 삼십 년 전쯤? 부주의로 유리컵을 깨뜨린 다음 날, 동생이 지원한 대학에서 불합격 통지를 받았다. 그리고 몇 년 지나 신입 과학교사 시절 실험실에서 비커가 깨져 버린 일과 작은 화재 사고가 연이어 일어나면서 ‘깬다’는 동사와 ‘재수 없다’라는 형용사는 마치 쌍둥이별처럼 둘이지만 하나로 겹쳐 보이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무언가를 깨뜨렸지만, 별일 없이 넘어간 적도 분명 있었을 거다. 하지만 기억은 집요하게도 나쁜 일이 일어난 경우만 기록하고 있었다. 불길한 징조라는 각인은 비슷한 일이 일어날 때마다 더 깊게 뇌에 뿌리를 뻗어갔다.
아들이 고등학교에 진학하자 징크스는 보란 듯이 나를 잠식하고 날뛰기 시작했다. 뭔 시험이 그리 많은지, 학교 내신 시험을 비롯해 각종 대회와 자격시험까지 학기뿐 아니라 방학 때도 줄줄이 시험이었다. 나라는 사람은 침착하지 못하고 덜렁거려서 늘 여기저기 부딪히고 뭔가를 잘 흘리고 뭔가를 잘 놓친다. 설상가상으로 때마침 찾아온 손가락의 퇴행성관절염. 어떤 물체를 손으로 잘 잡고 있으려면 전보다 더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다. 아들의 중요한 일에 불길한 징조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설거지는 초집중의 작업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아들 기말시험 전에 나는 설거지를 하다 접시를 깨고 말았다. 그릇을 놓칠까 싶어 고무장갑도 끼지 않고 조심조심 닦고 있었는데, 한순간 접시가 손가락에서 미끄러져 개수대 바닥에 꽝 부딪힌 거다. 그리고 며칠 후 기숙사에 있는 아들에게 휴대폰 문자가 날라왔다. ‘엄마, 수2 시험을 보는데 배가 아파서 진땀까지 흘리며 문제를 풀다 망쳤어요.’ 그 일로 나는 징크스에 모든 주도권을 빼앗긴 노예가 되어버렸다. 설거지 중에 그릇끼리 살짝만 닿아도 심장이 덜컹거렸다. 마치 신생아를 다루듯이 그릇을 만졌다. 이건 미신이고 불안은 그저 심리 현상일 뿐이라는 걸 이성적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제어가 되지 않았다. 워낙 예민한 기질이라 불안은 쉽게 증폭되었고 그럴 때 이성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다. 더 조심해야만 했다. 그 방법밖엔 없었다.
조심조심 주의를 집중해 물건을 다루어야 하는 것은 스트레스가 되었다. 스트레스는 차곡차곡 쌓였고 어느 순간 임계점에 이르게 되자 화가 났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내 뇌는 멍청하게도 ‘그릇을 깨는 것은 불길하다’라는 보편적 미신을, 우연히 일어난 경험에 끼워 맞춰 절대적 믿음으로 둔갑을 시키고서 나를 조종하고 있었다. 스스로 불안이라는 지옥에 가두고 있었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만둬야 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성적 논리로 반박하는 건 소용없었다. 심장은 이성과 따로 움직였다. 경험들이 새겨 놓은 뇌 속 회로를 바꿀 방도는 역시 경험뿐이었다. 그렇다면 징크스에 반하는 경험을 쌓아 뒤엎는 도리밖에는 없었다. 그릇이 깨져도 나쁜 일이 생기지 않는 경험을 쌓아 뇌 회로를 다시 새기는 거다. 방법은 하나. 매일 그릇을 깨면 된다. 징크스에 의하면 매일 그릇을 깼으니 매일 나쁜 일들이 벌어져야 한다. 하지만 그럴 리가? 분명 아니다. 매일 그릇이 깨지든 아니든 일상은 일상적으로 흘러갈 거다. 따라서 나의 징크스는 백기를 들고 사라질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내 그릇들을 깰 수 없었다. 요리는 못하면서 그릇은 좋아해서, 잠깐 미국에 살 때 한인 주부 사이트의 할인 정보를 매일 주시하며, 조금씩 조금씩 50%, 70% 할인가로 모은 그릇들이다. 나의 소중한 ‘빌보’(‘빌레로이 앤 보흐’라는 독일 브랜드)들을 어떻게 깬다는 말인가. 매일 그릇을 깬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때,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사고실험은 머리로 설계하고 실행하는 실험이다. 실험하기 어려운 조건이나 장치를 상상 속에서 설계하여 실험하는 거다. 예전 중학교 과학 교과서에 소개된 갈릴레이의 ‘관성의 법칙’ 실험이 대표적이다. 갈릴레이는 마찰이 없는 레일로 공을 굴리면 외력이 작용하지 않는 상태에서 영원히 계속 굴러간다고 했다. 이걸 증명하려면 마찰이 없는 레일이 필요한데 그런 레일을 만드는 일은 불가능했다. 갈릴레이는 처음부터 그것을 알았기에 상상 실험으로 이 현상을 설명했다. 거시적이거나 미시적인 현상을 거론하는 현대 물리에서 사고실험은 더 자주 등장한다. 아인슈타인은 특수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사고실험을 종종 이용했고, 물리학자 슈뢰딩거가 이야기한 그 유명한 ‘슈뢰딩거의 고양이실험’ 역시 사고실험이다. 그러니까 나 역시 사고실험으로 매일 접시를 깨면 되는 거였다.
나는 상상으로 매일 접시를 깼다. 역시나, 접시를 깼다고 나쁜 일만 일어나지 않았다. 비록 상상이었지만 뇌는 그것을 충분한 경험으로 받아들였고, ‘깨짐’과 ‘불운’의 연결 고리는 완전히 풀렸다. 설거지는 이제 운을 점치는 시간이 아니었다. 그냥 그릇을 닦는 행위일 뿐.
하지만 나는 여전히 설거지를 함부로 하지는 않는다. 징크스는 사라졌지만, 그릇을 살살 조심조심 다룬다. 남편이나 아들이 그릇을 바닥에 세게 놓으면 핀잔도 준다. 공을 들여 사들인 내 ‘빌보’들은 소중하니까.
『에세이문학』 2022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