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처음처럼
진연후
오전 10시가 되면 숫자를 확인한다. 늘어나는 자릿수, 점점 커지는 숫자에 아찔함도 잠시 깊은 한숨으로 익숙해지고 만다. 지난해엔 화상으로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고, 올해엔 마스크를 쓴 채로 사진을 찍고 손을 흔들었다. 예정되어 있던 이별이었건만 하루쯤은 아무런 이유도 계획도 없이 쉬고 싶었다. 계획 없는 휴일, 질문 없는 시험지를 받아든 것처럼 어색하다. 혼자 놀기 목록 중 ‘지난 시간 꺼내보기’를 클릭한다.
2020년 2월, 낯선 봄이 오고 있었다.
‘정부에서 코로나19 위기 단계가 경계에서 심각 단계로 격상되고 교육부의 학원 휴원 권고에 따라 휴원을 합니다. (중략) 사태의 심각성에 따라 휴원은 유동적임을 참고하여주시기 바랍니다. 조속히 안정되어 우리 모두 건강하게 학습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학원생 전체에게 단체문자 발송 후, 학원 문을 닫았다. 무급 휴직이다. 정해진 기한도 없는 휴직에 처음엔 당황스러움도 적잖이 있었으나 그동안 학생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정신없이 일에 치이고, 학생 수가 줄면 그런 대로 또 편치 않은 상황에서 힘들기도 했으니 휴가라고 생각하자.
처음, 일주일은 책도 읽고 문자로 수다도 떨고 빈둥거림을 즐기기도 하였다. 일주일에 이틀 정도 학원에 나가 부재중 전화 목록을 살펴보고, 앞으로 사용할 학습지를 만들었다. 그동안 미뤄두었던 책상 서랍 정리까지 쉬엄쉬엄 하면서 3주까지 보냈다. 길어야 2~3주일쯤이면 될 줄 알았다가 막상 한 달이 넘어가고 5주째 접어드니 처음 마음먹은 것과 달리 슬슬 생각이 뜀뛰기를 한다. 경제적인 불안감과 정해진 시간 안에 해야 할 일이 없다는 심리적 공허함까지 틈만 나면 비집고 들어왔다.
처음 학원 강사를 시작했을 때는 쉬는 일요일에도 혼자 출근을 하곤 했다. 조용히 혼자 나가 미리 수업 준비를 해놓고 나면 뿌듯했다. 책을 읽고 수업계획안을 짜고 혼자서 시뮬레이션까지 해보았다. 가끔은 수업 중간에 옆길로 새어 즐겁게 해줄 만한 유머도 미리 계산해놓기도 했다. 성공 확률은 별로였지만.
그러다 어느새 그냥 일상이 되고 에너지가 소진된 느낌이 주기적으로 찾아왔다. 그만두고 싶은 이유는 수없이 많았다. 학부모들의 거친 말에 상처를 받기도 하고 때로는 함께 일하는 강사들과의 마찰로 속이 편치 않기도 했다. 학생들이 모두 내 맘을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만큼 이룬 것이 있지도 않았다.
그럴 때면 다른 곳에서 학생 입장이 되어보기도 했다. 강의를 듣는 입장이 되었다가 수업을 하는 시간으로 건너오면 그동안 나태했던 나를 돌아보게 되고 자극을 받는 걸로 고비를 넘기고 또 한 해를 시작하였다. 그렇게 지나온 이십 년, 여러 가지 상황에 이제 그만 정리를 해볼까 하던 중이었다. 언제 그만두어도 별일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때가 온 것이다.
한 달이 지나고도 교육부에선 등교를 할 수 없다고 한다. 학교를 못 가는데 학원에 오라고 할 수 없다. 휴원 안내문을 붙여놓은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서 강의실을 한 바퀴 둘러본다. 내가 떠나겠다고 하기도 전에 갑자기 헤어지고 나니 아이들이 보고 싶어진다. 그래서 자꾸만 아무도 없는, 할 일도 없는 학원에 나가고 싶어졌다.
다시, 출근을 하게 되면 마냥 즐겁기만 할 거라고 믿을 만큼 나 자신을 모르진 않는다. 그래도, 그렇지만, 그럼에도 다음 주엔 학원에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아이들을 만나서 웃고 떠들 수 있는 평범하고 익숙한 일상이 조금 더 주어지길….
2020년 2월 그 후 학원은 두어 차례 더 문을 닫았고, 화상 수업을 하기도 했다. 쉬는 날이 길어지면 초조했고, 방역 지침을 지키면서 아이들을 만나는 시간도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그렇게 다시 또 다른 일상이 2년째 이어지며 익숙해지고 있다. 마스크를 쓰고 수업을 하는 것도, 다시 출근하면서 힘들다는 말이 습관처럼 나오는 것도 낯설지 않다.
여름에 아이스크림 하나 나누어 먹지 못하고, 마지막 수업에 피자 파티도 못 하고 헤어진 아이들. 언제쯤 마스크를 벗고 만나는 날이 올까, 그날이 오면 우린 서로를 단번에 알아보고 온몸으로 인사를 나눌 수 있을까? 헤어짐은 수십 번을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고, 늘 그랬듯이 미처 계획을 세우기도 전에 봄은 꽃을 피우겠지. 정해진 것 없이 맞이하는 봄이 처음은 아니건만 나는 여전히 봄바람이 낯설다.
한국산문 2022년 2월호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