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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례길이 된 프러포즈    
글쓴이 : 이용만    22-11-11 22:58    조회 : 4,272

순례길이 된 프러포즈

  


부부는 닮아가기 위해 만난 존재다. 오늘도 함께 산 만큼 서로 닮아간다. 매년 초여름이면 우리 부부는 청평 GS 인재개발원에서 하루를 묵는다. 고맙게도 이곳이 댄스 클럽 PARA의 파티 장소로 허락된 지 오래다. 우린 ‘가을 리마인드 웨딩 파티’의 35주년 당사자로 여느 해와 달리 일찍 도착했다. 꽃과 의상, 사진 작가도 준비되어 있다. 예행연습을 위해 10쌍의 은발들이 일찌감치 모였다. 결혼식을 앞둔 젊은이처럼 사랑 고백과 사진을 남기느라 쑥스럽고 소란스럽다. 연수원 대강당에 파티용 마루를 깔아놓으니 훌륭한 무도장이다. 호텔 파티처럼 화려할 필요도 없다. 60여 커플이 춤을 추기에는 좁지만 조촐하다.


나의 고민은 새삼 아내에게 프러포즈를 해야 한다는 거다. 다른 분들도 총각때는 쭈뼛거렸나 보다. 포즈잡는 것부터 사랑한다는 입에 발린 말 한마디까지 폭소를 터트리게 했다. 왠지 프로포즈의 진지한 상황을 제대로 연출해야 할 것 같았다. 이튿날 아침 홀로 호숫가를 산책하며 중얼거려 보았다.

"여보, 이제부터라도 잘 할께. 다시 당신과 빚을 갚는 결혼을 하고 싶어요"

어색하다. 소 귀에 경 읽기로 여길 터다. 또 살자는 말도 싫겠지. 나중에 편지로 보내나? 나이 어린 소녀는 추억 속에 있고, 나이를 더한 소녀는 내 앞에 있다. 소녀의 꿈을 소년은 들어주었을까.

 

일보다 취미에 더 빠진다. 골프와 댄스가 특히 그렇다. 말로 설득하는 게 버거운데 춤과 골프는 말이 필요 없어 좋다. 골프는 '핸디캡'이 말해주듯 '경쟁'이다. 작은 키에 더 멀리 보내면 그만큼 상대는 무너진다. 작은 키로 말미암은 낮은 무게중심이 안정감을 더한다. 반면에 댄스는 '조화'다. 둘 다 '부드러움 속의 강함' 이 최고다.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는 것은 '꿔다 논 보리 자루 옮기 듯' 여성을 안전하게 원하는 지점으로 옮겨놓는 일이라 했던가. 중심축의 이동으로 충분하다. 그래서 '춤으로 골프도 좋아진다' 고 믿는다. 힘으로 리드하면 상대는 불편한 법. 웃으며 내색도 하지 않음이 신사 숙녀의 웃픈 인내심이다. 내기 골프에서 상대가 잘못 친 볼을 위로하는 속 마음과는 정반대지만 '리듬 감'에서는 서로 통한다.

부부가 함께 해 온 취미를 생각할수록 고맙다. 정작 아내가 가장 원하는 게 뭐였을까. 아내는 교회 강론과 영성에 대한 지향이 항상 우선순위에 있었다. 아하! 가톨릭 주교님의 '축복장 받을 일'에 저렇게 들떠 있구나! 그렇다. 무릎 아픈 아내를 위해 남은 순례 길에 함께 해주면 축복장 받는 일을 거든 셈이다. 대여섯 차례 동행했을 뿐인데 벌써 다락골과 갈매못 성지를 끝으로 111곳 순례를 모두 마치는 날이다. 


갈매못 성당은 성전을 다시 잘 꾸몄다. 프랑스인 주교와 신부 두 분은 한양을 떠나 먼 곳 갈마연(渴馬淵) 모래사장까지 오직 죽으러 왔다. 경각심을 높이려니 처형 장소는 중요했나 보다. '만민이 평등하다'며 반상班常이 뒤집힐까 걱정하는 사람들과 다르다. 신념 때문에 죽는 이들이다. '포졸'은 포졸, '망나니'는 망나니다워야 하는가? 망나니의 칼은 목을 반만 베고 멈춘다. 사지가 뒤틀리는 고통을 보는 이들이 못 견딜 것을 망나니도 잘 안다. 편하게 죽여 달라는 금전의 흥정을 마친 사람의 목은 단번에 잘린다. 죽음의 현장에서도 속의 타협이 있다. 이차돈이 순교할 때 흰 피가 솟구쳤 듯, 갈매못 모래사장에는 은색 무지개가 떴다 했다.

 

갈매못 성당의 성체 조배실은 내가 보아온 중 제일 아름다웠다. 성화 '돌아온 탕자'는 긴 촛대 위 붉은 불빛과 스테인드 글라스로 들어오는 노을 빛으로 불타는 듯했다. 고요함과 위엄이 가득했다. 지금도 떠올릴 수 있는 내 마음 속 조배실이다. 순례 책자에 스탬프를 찍으며 기도를 올렸다. 아내는 내게 고맙다고 말했지만 내가 묵묵히 감사할 뿐이었다. 

 

피와 땀 또는 무명으로 순교한 이들을 생각하니 또 먹먹하다. 세상에 감사하고 세상에 진 빚이 이렇게 많다. 더 늦기 전에 그 빚을 갚아야 한다. 아내에게 하듯 세상을 향해 프로포즈 한다. 허락하실지 하느님께 여쭈어 봐야겠다. 살아온 삶에 감사하다. 함께 한 아내에게 감사하다. 인생의 하늘에 한 마디 던진다. "삶아, 감사하고 감사하다."                     


이용만

『아름다운 만남, 새벽을 깨우다』2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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