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예보에선 불볕더위라고 하던데 이른 아침 공원은 그리 덥지 않았다. 불어오는 옅은 바람이 제법 시원하기까지 했다. 이어폰에서 나풀나풀 흘러나오는 올드팝송. 노래에 살포시 마음을 얹으며 잔디광장 빈 벤치에 앉았다. 앞에 보이는 소나무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체조를 하고 있었다. 늘 이 시간, 이 장소에 모여 하는 운동 같았다. 동쪽 하늘에서 낮게 밀려드는 햇빛을 받으며 동작을 따라 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들. 가뿐가뿐 느긋하게 움직이는 팔과 다리. 왠지 미국 드라마와 영화에서 봤던 파룬궁과 분위기가 비슷해 보였다. 물론 움직임은 파룬궁과 전혀 달랐지만. 저 사람 중 누가 리더일까? 찾아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서로 마주 보고 있어 시작점을 알 수 없었다.
그때 휴대전화에서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리더를 찾는 일은 잠시 미루고 메시지를 열어 보았다.
“내 글인데, 좀 읽어봐 줄래? 에세이 수업 때 합평 받으려고. 지난번 글 읽고 사람들이 울었거든, 이번에도 울 것 같은데…. 너무 감정적으로 썼는지 좀 봐줘.”
일주일에 한 번 동네 문화센터에서 에세이 수업을 듣는 친구 호정이가 한글 문서와 같이 보낸 메시지였다. 지난번 호정의 글을 읽고 나도 눈물이 났다. 이번에는 울지 말자, 마음을 다잡으며 한글 문서를 열었다.
첫 문장부터 아렸다. 글 속에 아이가 있었다. 억센 비바람 속에 무방비로 혼자 서 있는 아이. 어른들은 잔인했고, 아이는 고스란히 그것을 삼켜야 했다. 어른 호정이는 차분히 그때의 일을 묘사했다. 덤덤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어서, 아이 호정의 표정도 덤덤해 보였다. 아이는 감정이 읽히지 않는 표정으로 그 자리에서 견디고 있었다.
호정이는 어디서든 리더였다. 누구도 고민 없이 호정이를 모임의 대표로 뽑았다. 그는 호기심이 많아 다양한 동호회 활동을 하고 있고, 각 분야에서 전문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해박하기까지 하다. 몇 년 전 가구 조립을 하면서 세상 이렇게 재미있는 거는 없다는 표정으로 설명서를 바라보던 모습이 떠올랐다. 호정이는 늘 그랬다. 세상 이렇게 재미있는 거는 없다는 표정으로, 기발한 두뇌로, 손재주로, 우리를 즐겁게 했다. 그리고 우유부단하고 소심하여 징징거리는 나의 투정을 늘 받아주며 호탕하게 지지해줬다. 호정이의 어렸을 때 일은 최근 글을 보고서야 알았다.
호정에게 문자를 보냈다.
“호정아, 너 너무 훌륭하게 잘 컸다. 이런 일을 겪은 줄 전혀 몰랐어.”
“내가 좀 잘 컸지? 내 생각도 그래. 너무 감정적인 거 같지는 않고?”
“아니, 전혀. 오히려 담담하고 객관적으로 써서 슬퍼. 다들 또 울겠다. 그리고 마지막에 인용한 가요가 이 글에서 신의 한 수 같아. 침착하게 이야기하다가 마지막 반전처럼, 너를 힘들게 한 것들의 머리끄덩이를 확 잡고 패대기치는 것 같아.”
자우림의 「뱀」이었다. 처음 듣는 곡이었다. 수필 수업 사람들도 이 노래를 모를 거 같다며, 호정이는 합평 시간에 직접 불러줄 거라 했다.
“뭐? 직접 부른다고? 굳이? 폰으로 틀어주면 되잖아?”
“아니. 불러줄 거야. 사람들 그만 울라고. 재미있잖아.”
호정이는 노래를 상당히 잘한다. 사람들을 웃기려면 일부러 좀 못 불러야 할 것 같은데? 울음을 멈추게 하려는 계획은 실패하지 않을까?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궁금해졌다. 사람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호정에게 강의 후일담을 꼭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휴대전화 화면을 닫고 고개를 들어 다시 공원 풍경을 바라보았다. 작은 액정에 너무 집중해서 그런지 눈이 뻑뻑하고 어른거려 몇 번 깜빡여야 했다. 이름을 붙이기 힘든 감정의 부유물들이 심장 부근에서 흔들리며 떠다니는 것 같았다. ‘차분하다, 덤덤하다, 담담하다, 침착하다’ 이런 단어들을 생각했다. 그 ‘생각’의 중력으로 흔들리는 것들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체조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팔과 다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아까보다 사람들이 늘어 그들의 대형은 원이 아닌 길쭉한 타원형이 되어 있었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 때문에 들리지는 않았지만, 음악에 맞춰 움직이는 듯 보였다. 그들의 운동은 예전 학교에서 배운 국민체조 같기도 하고 간단한 에어로빅 동작 같기도 했다. 그저 ‘맨손체조’라고 부르면 딱 맞을 가벼운 체조. 크게 손을 뻗는 사람, 소심하게 손을 흔드는 사람, 반동이 큰 사람, 중간에 손뼉을 치는 사람. 같은 동작인데도 사람들의 움직임은 다 달랐다.
움직이는 타원형을 멍하게 바라보다 그냥 실없이, 그들의 운동이 지구를 돌리기 위한 태엽 감기 같다고 느꼈다.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모여 타원 대형을 만들고 몸을 움직여, 지구가 멈추지 않고 굴러갈 수 있게 태엽을 감는 거다. 중력이 제 몫의 중심을 꽉 잡고서 우리의 일상이 궤도를 일탈하지 않도록 태엽을 친친 돌리는 일. 음악에 맞춰, 서로를 바라보며, 각자의 방식으로 영차영차.
더 더워지기 전에 일어나야 했다.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지구의 태엽을 감는다’라는 말에 혼자 취해서는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갔다. 호정이는 아침 명상으로 시작해서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주며 태엽을 돌리는 걸까? 상처에 붕대를 돌려 감듯이 시간을 겹겹이 돌려가며 쌓아가는 걸까? 그렇게 상처는 점점 뒷걸음쳐 멀어지는 걸까?
며칠 후 호정이가 합평 후일담을 전해줬다.
“노래를 불렀어. 갑자기 내가 불렀더니, 다들 울다 웃더라. 눈물이 쏙 들어갔다고 하더라.”
『한국산문』 2022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