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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부고속도로 한국산문 21.06    
글쓴이 : 박경임    23-02-22 13:59    조회 : 2,948


경부고속도로

pkl1027@hanmail.net 

                                                                                                                                               박경임

 

  경부고속도로 50주년을 기념한다는 티브이 안내를 보다가 아득한 옛날이 생각났다.

1975년이니 경부고속도로 개통 5년째가 되는 해였다. 나는 인문계 여고를 나와, 주산, 부기를 못 하니 작은 회사의 경리 자리도 찾기 힘들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1년 동안 하릴없이 청춘의 고뇌를 곱씹으며, 나를 대학에 보내주지 못한 부모만 원망하면서 막걸리 집에서 못 먹는 술을 퍼먹기도 했다. 아버지는 공무원시험이라도 보라고 달래기도 했는데 그 시절 공무원은 별 인기 있는 직업도 아니었고 상명하복의 낡은 분위기가 싫었다.

 그러다가 엄마의 권유로 고속버스 승무원 시험을 보게 되었다. 그 당시 고속버스 승무원은 높은 연봉과 소녀들에게 인기 있는 직종이어서 기수별로 30명 정도 선발하는데 1000여 명에 달하는 소녀들이 모여들었다. 필기시험과 스피치, 워킹 등 거의 미스코리아 뽑는 것 같은 과정을 거쳐 30명이 동기생으로 만났다. 새로운 세계로 나아간다는 기대로 가슴이 콩닥거렸다. 승무원들은 휴무일에 빈자리에 무임승차가 가능해서,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회사 노선이 있는 전국 어디든 공짜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선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3개월의 호된 교육이 시작되었다. 달리는 차 안에서 물 쟁반을 들고 걸어야 해서 중심 잡고 걷기, 마이크 사용과 오디오 작동법, 안내방송 외우기, 화장법, 고객 응대 훈련, 사고 시 대처 방법 등 항공 회사 교육팀이 진행하는 교육은 스튜어디스 교육과 거의 같아서 고되고 힘들었다. 특히 인터체인지 안내방송을 외우는 것이 제일 힘들었던 것 같다. 30명의 동기생이 교육을 시작했는데 졸업할 때는 20명이 채 안 남았다.

 처음 승무를 하던 날, 선배 승무원이 안내하는 차에 같이 타서 선배가 하는 것을 보고, 잠깐씩 마이크를 넘겨받아 안내방송을 해보는데 어찌나 목소리가 떨리던지,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얼굴이 붉어지는데 손님들은 손뼉까지 쳐가며 햇병아리 승무원에게 용기를 주었다. 다음 기수가 뽑힐 때까지 제일 짧은 노선부터 시작해서 점차 긴 노선으로 승무 배정이 올라갔다. 처음엔 평택노선부터 시작했는데 하루에 다섯 번을 왕복하면 편도 10편이었다. 잠깐 쉬는 시간에 손님에게 줄 물을 채우고 컵을 씻고 정신없이 차에 타서 출발 안내방송을 하면 여기가 평택인지 서울인지 정신없이 헤매기도 했다, 집안 형편으로 대학을 포기하고 친구들도 만나기 싫을 만큼 자신이 없었는데, 사람들이 나를 한 번 더 보려고 하고 시내 도로에서 신호등에 걸려있으면 손을 흔들며 좋아해 주는 모습에서 자신감을 얻었고, 45인승 버스 안에서는 내가 최고인 시간을 보내면서 새로운 나로 태어날 수 있었다. 좁은 단칸방의 집을 떠나 잘 꾸며진 숙소에서 또래의 아이들과 지내는 것은 재미있었지만 기수별 대접은 거의 군대 계급 수준이었다. 숙소에서 선배들의 가방을 건너가는 것조차 어려운 분위기여서 행여 목욕탕에서 부딪히는 일이 없기를 바라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에서 눈물 흘려가며 얻어 온 차관으로 만들었다는 경부고속도로. 428KM가 우리 국민에게 생명의 젖줄이 되어주었듯이 나에게도 경부고속도로는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준 고마운 길이다. 승무하는 동안엔 근사한 제복에 흰 장갑 낀 손을 흔들며 만나는 모든 것들은 오롯이 내 것이 되는 시간이었다. 석양이 물드는 저녁 하늘을 보며 손님들에게 정해진 인터체인지 안내방송이 아니라 시적인 감성으로 내 나름의 설명을 들려주기도 했는데, 자주 고속버스를 이용하는 고객 중에는 일부러 내 승무 시간을 찾아 탑승하는 사람도 있었다. 승무원실에 개별 팬레터도 쌓이던 나름 인기인이기도 했다. 대전 아래로 가면 그 시절 고속도로는 아주 한산해서 가끔 만나게 되는 같은 회사의 차를 보면 헤드라이트를 켜서 반가움을 표시하기도 했으니 요즘처럼 복잡한 도로에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일 것이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가면 승무원들은 무상으로 먹을 수 있었는데, 천안의 호두과자. 금강유원지의 가락국수가 기억에 남는다. 휴게소에 다녀오면 손님들이 수북이 내 자리에 쌓아놓은 간식들을 챙기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서울에서 출발하는 마산행 일요일 막차는 거의 절반이 해군 장병들이었다. 12일의 외박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기도 하고 군인들이 여럿이 모이다 보니 객기도 발동해서 그들은 서로 교대로 한 사람씩 나를 불러 세우며, 물 주세요. 사탕 주세요, 에어컨이 안 나오네요, 음악이 잘 안 들려요, 뭐 이런저런 주문을 하며 마산까지 여섯 시간을 괴롭히기도 했지만 같은 또래의 청춘들만이 통하는 웃음으로 긴 시간 즐겁게 갈 수 있었다. 특히나 마산터미널에서 숙소까지 걷는 길은 양 옆으로 벚꽃나무 가로수가 너무 아름답고 고즈넉해서 내가 영화 속 한 장면 속에 있는 것 같아 일부러 천천히 걸어 들어가곤 했다.

 그즈음의 고속버스는 거의 일본산 중고차여서 창틈이 벌어져 있는 차들이 많아 여름엔 에어컨이 시원찮고 겨울엔 실바람이 스며 고객들의 원성이 잦기도 하고, 펑크도 잘나서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삼각대 앞에서 깃발을 흔들며 고속도로에 서 있기도 했다. 겨울에 유리가 얼지 않도록 부동액으로 유리창을 닦는 일이 제일 싫었다. 귀퉁이가 잘 안 닦여서 그 틈으로 서서히 유리가 얼어오면 기사의 눈초리가 사나워지기도 했다. 그래도 자동차 맨 앞자리에 앉아 너른 도로를 달리는 쾌감에 모든 시름을 잊을 수 있었다어두운 밤 고속도로에 눈이 내리면 기사는 어렵고 힘들었겠지만, 나는 아다모의 <눈이 내리네>를 틀어놓고 헤드라이트 불빛에 따라 춤추는 하얀 눈발을 바라보며 한없는 상상 속으로 날아가곤 했다. 20개월 정도의 짧은 승무 생활을 마치고 결혼해서도 다닐 수 있는 공무원시험을 보기 위해 퇴직했는데 생애 첫 직장이던 고속버스 승무원 시절은 내게 특별한 시간이었다. 공무원이 되어 받은 첫 월급이 승무원 월급의 절반도 안 되어서 실소했던 생각도 난다..

 50년 동안 경부고속도로는 너무 복잡해졌지만, 내 마음속에는 까만 밤 속에 고요하던 부산행 막차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낮게 음악을 틀고 잠든 승객들을 한 바퀴 돌아보고 내 자리에 앉으면 무사히 하루가 마무리됨에 감사하면서 어두운 청춘의 터널을 빠져나온 나를 대견해 했다. 경부고속도로가 더 넓어지고 화려해진 것처럼 내 삶도 더욱더 단단하고 화려해 지리라 기대하며 다음 주에는 고속도로를 달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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