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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멍게젓 ( 동인지 『산문로 7번가 』7호)    
글쓴이 : 김주선    23-05-25 14:46    조회 : 2,041


가을 멍게젓 / 김주선

 

 포항에서 횟집을 운영하는 지인이 제로데이 택배로 횟감을 보냈다. 분당에 있는 종합 버스 터미널 수화물 보관소로 향한 것은 정오였다. 4시간 이상 장거리 배송을 감안해 아이스팩으로 채워진 수화물 상자를 받아서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멍게는 껍질이 단단하고 큼직한 놈으로 예닐곱 마리쯤 될까. 탱탱한 돌기 부분을 잘라 낸 다음 살과 껍질 사이에 손가락을 넣어 살을 돌려 빼냈다. 빨리 섭취하지 않으면 버리게 될 판이어서 에라 모르겠다 젓갈이나 담가 보자라는 실험 정신에 빛나는 아이디어가 번뜩였다. 비싼 해삼은 맛보기 정도로만 두어 마리 들어 있어 내장을 따로 모아 둘 필요가 없었다. 집도의처럼 칼을 들어 꼬들꼬들한 해삼은 안주로 내놓고, 멍게는 반찬감으로 손질해 소금과 소주를 넣고 적당히 절여 두었다. 식구들 모두 활어회 맛에 반해 곁들이로 올라온 멍게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자 생각해 낸 궁여지책이었다. 

하얀 아끼바레로 지은 밥에 고노와다를 얹어 먹고 싶다라며, 미혹迷惑과 집착執着을 끊어 버리지 못한 큰댁 당숙모는 병원 신세를 진 이후로 밥 한술도 못 뜨고 끝내 눈을 감았다.

경북 문경 틀모산 암자에서 대처승의 아내로 살았지만, 성불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사람들이 일제의 잔재였던 대처승을 배척하자 당숙은 식솔을 이끌고 산에서 내려와 사삿집에 터를 잡고 염불과 참선에만 전념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승만의 정화 정책으로 승려 생활을 그만두고 속세로 돌아가 재가불자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가의 인연과 마음의 번민을 어쩌지 못해 이런저런 병을 얻은 당숙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숙모는 마음이 흐려져 기도마저 놓고 사셨다. 말년에는 무엇에 홀렸는지 고향으로 돌아가 염주 대신 숟가락 위 하얀 밥에 얹어 먹을 해삼창자젓을 찾았다. 일본에서는 고급 요리로 통한단다. 유학을 다녀온 아들 덕에 고노와다를 맛본 숙모는 수행에 방해될 정도로 그 맛을 탐했다. 김치에조차 젓갈을 넣지 않는 불가에서 젓갈 반찬이라니 신실한 불자들은 믿기지 않겠지만, 당시엔 결혼과 육식을 금하는 전통 불교 종단과 달리 일가를 이루고 더러 고기를 먹는 종단도 있었다.

언젠가 통영에 갔다가 해서장海鼠腸(고노와다) 비빔밥을 시켜 먹었을 때 큰댁 찬장에 있던 젓갈 항아리가 떠올랐다. 소금에 절여져 누렇게 삭은 젓갈이 그다지 내 입맛에는 맞지 않았지만, 죽음의 문턱에서도 당숙모가 찾았던 그 절대적인 맛이 궁금하기는 했다.

영덕에서 나고 자란 당숙모에게서는 언제나 멸치액젓 같은 바다 냄새가 났다. 갯내와 바다를 지척에 두고 산 그녀와 강원도 내륙 지방에서 흙만 파먹고 산 엄마의 입맛은 극명하게 갈렸다. 당숙모가 하얀 쌀밥에 젓갈을 올려 먹는 맛을 일품으로 친다면 엄마는 더덕김치나 고들빼기김치를 얹어 먹어야 일품으로 쳤다. 산골 여인이 먹어 본 해산물이라고 해 봤자 소금에 절인 간고등어나 꽁치, 꾸덕꾸덕 말린 양미리, 그리고 임연수 정도였고 젓갈류는 새우젓이 고작이어서 김치를 담그는데도 액젓을 쓰지 않았다.

어릴 때 부모님을 따라 큰집 잔치에 갔다가 멍게와 해삼을 처음 보았다. 집안 어른 중 한 분이 엄마에게 술안주용으로 손질을 부탁했다. 엄마가 우물가에 쪼그리고 앉아 해삼의 배를 가르고 소면 같은 창자와 내장을 긁어내는 모습을 나는 징그러워하며 쳐다보고 있었다. 엄마는 손질된 해삼을 도마 위에 놓고 잘게 썰어 접시에 먹기 좋게 담았다. 그러고는 내 주먹만 한 붉은 멍게를 집더니 해삼과 마찬가지로 배를 가르고 검은 내장에 뒤엉킨 펄과 노란 속을 긁어내어 음식 찌꺼기 통에 버렸다. 오돌토돌한 돌기 부분은 먹기 좋게 썰어 그것 역시 해삼 옆에 담아냈다. 그런데 술상을 본 사람들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는 멍게 살을 어떻게 했냐고 엄마에게 묻는 거였다. 못 먹는 멍게껍질을 살인 줄 알고 썰어놓았으니 땅콩 껍데기처럼 말라 버린 안주 접시는 볼품없었다. 내장인 줄 알고 버렸다며 당황해하는 엄마 모습이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어렸을 때 많이 써먹던 욕이 바보 멍청이 해삼 멍게 말미잘이었다. 바보 멍청이와 동급으로 취급당할 만큼 사실 멍게에게는 뇌가 없었기에 이 욕을 듣는 애들은 기분 나빠했다. 그렇다고 해삼, 말미잘도 딱히 나은 건 없었다. 산골에서 욕으로나마 먹었을 뿐이지만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나이 들어 횟집에서 곁들이 안주로 나온 멍게 한 점을 맛본 엄마는 두 번 다시 멍게에 젓가락을 대지 않았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멍게는 특유의 향으로 호불호가 갈렸다. 바다 향이 깊고 쌉쌀하고 텁텁한 맛이 강했다. 초장을 듬뿍 찍어서 장맛으로 먹는다면야 모를까 멍게는 여전히 먹기 힘든 해산물 중에 하나긴 하다. 그래서일까. 나는 가끔 싱싱한 해산물을 보면 날것으로 썰어 먹기보다 젓갈을 담그고 싶어진다. 오징어젓갈 정도는 자주 해 먹는 우리 집 별미였기에 나는 젓갈 간을 잘 맞추는 편이었다.

사돈뻘 되는 먼 집안이 소래포구 어시장 근처에서 젓갈 가게를 운영한다기에 시누이를 통해 추젓과 오징어젓, 어리굴젓을 얻어먹곤 했다. 언젠가 한 번은 콧바람도 쐴 겸 구경 삼아 어시장에 놀러 갔다가 직접 젓갈을 담그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날은 맛을 안다는 사람만 아는, 봄이 제철인 멍게젓을 담그고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참 생소한 젓갈류였다. 회로도 안 먹는데 젓이라니. 한 점 집어 맛을 보라는데 선뜻 내키지 않았다. 아직 발효가 안 되어 그런지 쌉싸래한 향과 갯내가 나 비렸다. 해삼창자젓만큼 그 맛 또한 호불호가 갈릴 듯했다.

강원도에선 젓갈보다는 식해를 주로 만들어 먹었다. 가자미식해가 유명하지만, 우리 집에선 북어 식해를 만들었다. 산간 지방까지 배송되는 과정에서 날생선은 상하기 쉬워 마른 북어를 두들긴 다음 조로 만든 고두밥과 엿기름을 넣었다. 여기에 고춧가루와 다진 파, 마늘, 생강, 소금을 넣어 고루 섞으면서 버무리면 되었다. 항아리에 꾹꾹 눌러 담아 청국장 띄우듯 따뜻한 곳에서 사나흘 삭히면 밥도둑이 따로 없었다. 

맑게 갠 가을, 젓갈에 얽힌 가벼운 회포懷抱를 풀다 보니 어느덧 땅거미가 내린다. 소금에 절인 한 줌 거리밖에 안 되는 노란 멍게 살을 체에 받아 물기를 뺀 다음 준비한 양념을 섞어 버무렸다. 양념 계량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으나 며칠 후 뚜껑을 열었을 때 온 집 안에 퍼질 냄새와 그 맛이 어떨지 자못 궁금하다.

울산 방어진에 사는 언니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오징어 한 축을 말리는 데 성공했던 것은 가까운 바다에서 불어오는 짭조름한 해풍 덕이었다. 해풍은커녕 소금마저 간수가 덜 빠져 쓴맛이 도는데 봄철도 아닌 가을 멍게젓이 과연 성공할까. 밥도둑은 아닐지언정 음식 쓰레기는 되지 말아야 할 텐데. 감자바위가 고향인 나의 주방에 난데없는 해풍이 불고 있다.


( 동인지 『산문로 7번가 』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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