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게 살기
취향에 따라 취미는 다양하다. 선뜻 시도하지 못하는 것 중 하나가 댄스(Dance)이다. 파트너와 몸과 마음으로 교감하는 커플 댄스는 제약이 따르게 마련이다. 호흡이 맞지 않거나 여성의 드레스 자락을 밟아도 무대에서 넘어질 수도 있다. ‘나는 왼발만 두 개(I have two left legs)'라는 영어 표현이 재미있다. 오른발이 없는 ‘깽깽이 발’ 이니 춤을 추지 못한다는 ‘몸치’라는 표현이다. 온전히 무게 중심을 옮겨야 제대로 ‘나의 몸이 파트너의 몸에 말을 건네서’ 좋은 춤을 만든다.
고정관념은 새로움에 반응하기 어려운 허점을 지닐 수 밖에 없다. '남녀칠세부동석'같은 유교적 인습으로는 남녀가 손을 맞잡고 춤을 추는 일을 주저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낯설게 하기는 익숙함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댄스에는 건강과 즐거움 뿐만아니라 삶의 철학도 녹아있다. 타이타닉 유람선이 침몰하는 중에도 마지막으로 커플 춤을 추는 장면은 목전의 죽음 앞에서도 의연한 품위를 보여주었다. 낯설게 하기는 새롭고 친근하되 공감을 얻어야 한다.
러시아 비평가 쉬클로프스키(1893~1984)가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를 처음 제시하였다. ‘낯설게 하기’는 언어의 일상적 습관에서 벗어나 지각(知覺)의 자동화를 지연시킴으로서 감동과 효과를 높인다는 문학 비평 이론이다. 기억은 휘발되거나 기억하고픈 것만 기억하므로 불안정하다. 그렇다고 진솔하게 있는 그대로 옮긴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문학의 본질은 형상화, 의미화 및 이화(異化)라고들 말한다. 미술 음악 영화는 물론 비즈니스에까지 창의적인 것이 주목받는데 변화의 속도마저 빨라졌다.
왜 100년도 넘은 이론인 ‘낯설게 하기’를 지금 이야기하는가? 무엇이든 낯설게 접근해 봄으로써 대상의 ‘인지’를 넘어 ‘시야’를 확장하거나 창조한다. 낯설게 하기는 종종 역발상이고 영감을 불러 일으킨다.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 1898~1967)는 그림으로 ‘낯설게 하기’를 웅변한다. ‘겨울비’로도 알려진 그의 작품〈골콩드Golconde, 1953〉에서는 중절모를 쓴 신사들이 제각각 하늘에서 내리는 비로 그려져 낯설다. 그의 성장 과정이 그림을 관통하는 걸까? 베일을 둘러 쓴 채 키스하는 작품 ‘연인들, 1928’에서는 14세 소년 시절의 르네 마그리트의 슬픈 이야기가 숨겨진 듯했다. 모자(帽字)를 만들던 어머니의 자살과 그녀가 입고 있던 하얀 드레스로 얼굴이 덮인 채 연못 수면에 떠오른 시신이 떠올랐다. 카프카의 ‘그레고리 잠자’가 배만 불룩해진 벌레로 변한 모습이 ‘내가 아닌가’ 하며 각인되었던 이유와 한 가지다.
커플 댄스는 더욱 낯설 법도 하다. 무도회 풍(風)의 전통적인 볼룸 (Ballroom)댄스를 즐기기에는 노력과 비용도 만만찮다. 시도조차 않는 이들은 춤을 천지개벽할 일 처럼도 여긴다. 음악의 박자와 리듬을 이해하는 폭도 다르다. 맞잡은 손으로 느껴지는 홀딩(holding)으로 부드럽거나 강한 텐션(tention)의 느낌에서 외모와 전혀 다른 내면을 마주하기도 한다. 몸과 마음의 ‘서로 다름’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낯선 즐거움이 작지 않다. 노년에 접어들면서 건강이 예전 같지 않고, 의외의 사고나 질병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춤이 도움이 된 경우는 감동적이기도 했다. 그 낯선 경험이 춤에 몰입하게 한다.
얼마 전 호텔 그랜드 볼룸에서 열린 정기 댄스파티에 80세 커플을 초대했다. 자수성가하여 ‘흙 수저도 금수저가 될 수 있다’며 청년에게 용기와 희망을 전하느라 바쁜 분이다. 회원으로 가입하겠다는 말씀에 놀라면서도 춤에 대한 철학과 해낼 수 있다는 용기를 느낄 수 있었다. 크루즈 파티에서 노부부가 함께 춤을 추는 의미를 느지막히 실천에 옮기고 싶지 않았을까. 마음은 몸을 춤추게 하고 몸은 마음을 춤추게 만든다. 댄스 루틴을 연습하며 투닥거려도 커플로 춤을 추는 자체가 누군가에는 예술이요 기적 같은 일이다. 인생에서 재미와 의미 있는 영감을 더하고 싶어 하는 한, 1세기 전 쉬클로프스키가 명명한 ‘낯설게 하기’는 이곳저곳 지금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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