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피아노
한강변을 걷고 있는데 아내한테서 전화가 왔다.
“여보, 열 받아서 피아노 샀십니더.”
“피아노를 샀다고? 무슨 바람이 불었노!”
운동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 보니 아내가 피아노를 조립하고 있었다. 내가 도와주려고 아내한테 다가가자 “오늘 창피해서 혼났십니더.”
라고 말했다.
아내는 올해 '00여대 아동미술보육과'에 입학했다. 오늘 피아노 수업이 있었는데, 두 사람씩 짝을 이뤄 의자에 앉아서 ‘손가락 잇기 연습’을 했단다. 아내가 어느 학생 옆에 앉으니까 그 학생이 일어나서 다른 데로 가버리자, 다른 학생 옆에 앉아서 연습한 다음 그 학생에게 저녁을 사줬다고 했다. 집에 오는 길에 ‘디지털 피아노’를 샀단다.
“얘들이 그럴 수 있지, ‘도 레 미’ 음계 자리도 모르는 당신과 함께하면 본인 성적에 불이익을 받을 수 있잖아, 당신이 이해해요.”라고 아내를 달랬다. 그 후 아내가 들고 있던 ‘멍키스패너’를 빼앗아 피아노 건반을 붙들고 볼트를 조였다. 전기 코드를 꽂아주자 아내가 피아노 건반을 두들겼다. 아내 기분이 조금 누그러진 것 같아서 한마디 거들었다.
“당신은 젊은 친구가 많아서 좋겠수.”
“어제는 팀 작업을 했십니더, 팀을 정할 때 어느 팀으로 갈까 망설이고 있었는데, 한 학생이 함께하자며 내 손목을 잡아 당깁디더.”
아내 말에 따르면 한 사람을 눕혀 놓고 형태를 그린 다음,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물어가며 캐릭터를 그렸단다. 그 사람이 사랑한다고 하면 누군가 먼저 나서서 남녀가 뽀뽀하는 모습을 그리고, 슬프다고 하면 또 다른 학생이 나섰는데, 사람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재빨리 그렸지만 아내는 무엇을 그릴지 생각이 나지 않아 망서렸단다.
새내기 여학생들은 20대 초반이고 아내는 환갑이 지난지라 어제의 청춘이 오늘날 백발이듯, 아내는 젊은이들보다 느리고 감각이 떨어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아동 미술보육과’는 영유아를 가르쳐야 하므로 피아노도 배워야 한다. 아이들 셋을 키우면서 우리 집에는 피아노가 있었지만 아내는 무관심했다. 그런데 요즈음 ‘음악교육의 이해. 피아노 코드배우기. 악보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단다. 아내가 건반을 만지작거리다가 의자에 앉았다. 오늘 배웠던 악보를 꺼내놓고 ‘사과 같은 내 얼굴’을 치는데 손가락이 징검다리를 건너듯 했다.
사과 같은 내 얼굴 예쁘기도 하구나/ 눈도 반짝 코도 반짝 입도 반짝반짝
김방옥 작사, 외 국 곡
아내는 피아노를 떠듬떠듬 치다 말고 ‘피아노 때문에 속상했던 이야기’를 가족 카톡방에 올렸다.
아내: ‘피아노 한 대에 두 명이 의자에 앉아서 연습하는데, 내가 앉으니까 학생이 일어나서 다른 데로 가버렸다. 왕따 당했어!’
둘째 딸: ‘많이 서운했겠네. 화 풀어요.’
첫째 딸: ‘딸들이 가르쳐드리겠습니다.’
하며 손자가 배웠던 ‘바이엘’ 책을 갖다 준다고 했다.
막내딸: 초등학교 교사라 그런지 ‘피아노 치는 동영상’을 보내왔다.
아내가 다니는 00 여자대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아동미술보육과는 0세에서 6세에 이르는 영유아를 보호하고 교육할 수 있는 ‘전문 보육교사’를 양성한다고 되어있다. 특히 어린이는 말귀를 못 알아듣고 종잡을 수 없이 덤벙대기 때문에, 학생들은 인내와 협동심을 기르기 위해서 팀 작업이 많은 모양이다.
아동미술보육과 학생들은 공부를 마치면 유치원이나 유아원에 취직한다는데, 아내는 유아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봉사활동을 하고 싶단다. 피아노를 사더니 아내 마음은 어느새 유아원에 가 있는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어폰을 낀 채 피아노와 씨름하고 있다. 악보를 바라보며 건반을 손가락으로 짚어갈 때, 카톡· 카톡 전화기가 또 울렸다. 사위가 끼어들었다. “피아노 샀어요? 장모님 파이팅!”
성동신문 2023/0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