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에서 시작했다
봉혜선
“저, 집이 어디예요?” “네?” “집이 어디냐고요. 질문하라고 했잖아요.” “타임(TIME)지와 관련 없는 질문 같은데요.” “그런 말 없었잖아요” “ㅇㅇ동이요. 그럼 다른 분 질문 없으십니까.” “두 번째 질문. 전화번호가 뭐요?” “뭐라고요?, “아니 왜 그러시는데요?” “질문 있으면 하라면서요. 내가 술 먹는 데가 ㅇㅇ동인데 술 먹다 돈 모자라면 전화하려고요”
모 여대에서 주최하는 ‘TIME반 합동 발표회’에 학교 대표로 참가한 자리다. 시내 10여 개 대학 TIME반 대표들이 발표자와 함께 참석해서 인원이 많았다. 많은 대학이 축제를 여는 가을이었다.
메모를 하긴 할 모양이다. 그런데 다리 하나를 꼬아 다른 다리에 올리고 비스듬히 기대 앉아 왼쪽 손바닥을 펴고 모나미 볼펜을 거꾸로 쥐었다. ‘와, 무슨 저런 사람이 다 있지. 메모를 하려면 노트를 꺼내고 볼펜심을 제대로 올려야 하는데... 아버지에게 배운 대로, 학교에서 배운 대로라면 말이야.’ 그의 술값이 모자랄까봐 걱정이 되기라도 할 듯 회장이 말한 동네 이름을 떠올려보려 했으나 내 얼굴이 다 화끈거려 어디라고 말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 이 학교 회장은 참 마음도 좋지, 어떻게 위기를 잘도 피해가네.’
따로 오면 알려줄 듯한 어조로 서둘러 자리를 수습한 주최측 회장이 식사 대접을 하겠다며 예약해 놓았다는 중국집으로 자리를 옮기자고 했다. 동행한 친구를 재촉해 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20명이 넘는 인원이 다 들어오기도 전에 들어온 자장면을 대충 비비더니 세 젓가락질 만에 다 먹는 기이한 장면이 또 연출되었다. 아버지라면 어림없다. 자장면이야 식든 말든 주최자의 인사말이 있고 잘 먹겠습니다 라든가 건배 같은 동류의식 확인의 인사가 오가는 것이 순서다. 아니면 적어도 사람들이 다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기본이다.
일단의 비 매너와 무례함이 나쁘게 보이지 않은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을까. 식사 자리에서 나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악수나 하고 헤어지죠.” 하며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 당황한 건 그쪽이다. 지금 움직이면 자기네 학교 영어 연극을 볼 수 있다며 같이 가자는 답이 즉각 돌아왔다. 한껏 예의를 갖추어 말했을까. 아니면 상황 대처가 빠른 사람일까. 그러고도 싶었으나 우리 학교 축제 준비로 전날 잠을 못 자 자리에 앉으면 분명 졸 것 같았다. 다음을 기약했다. 성사되었을 수도 있는 첫 번째 데이트는 나의 거절 아닌 거절로 이루어지지 못했으니 나의 거절은 한 번 뿐이었음을 그때는 미처 몰랐다.
여전히 축제 기간 중인 다음 날 우리 학교 입구 주변. 며칠 전 구한 축제 팅 파트너를 만나러 종로서적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데모로 밀린 길에서 40분 늦었어도 기다려 준 파트너를 향해 뒤늦은 설명과 미소를 발사하며 성장한 차림으로 올라가는 길이라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여대여서 평소에 아무리 남자가 귀한 구경거리일지라도 아는 선후배 파트너가 아니라면 내 파트너에게 신경 쓸 수밖에 없다. 동아리에서 연 주점에 들어서니 내 앞으로 매출이 잔뜩 올라 있었다. 초대했으나 자리를 비웠으니 당당하게 먹고 마시고 간 무리가 있었단다. ‘그’답게 외상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올라오는 길에 나를 불러도 아는 척을 안 하더라며 당당했다.
다음 해 축제의 일환으로 학과에서 연극 형식의 ‘모의 주주 총회’를 열기로 했다. 매일 저녁 모여 공부하는 서클을 도맡고 있어서 출연을 할 수 없는 내가 맡은 파트는 섭외부장이다. 주주총회를 도와줄 남학생이 필요했다. 같은 경영학과 학생인 오빠는 군대에 가 있었다.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 엉뚱함으로 주목 받았으나 다니는 학과와 학교만 겨우 알 뿐 이름도 모르는 그다.
학회장과 그가 다니는 학교 서클에 찾아가니 고시공부를 하러 고시원에 들어갔다는 ‘의외’의 소식을 전해 주었다. 휴대전화가 없던 때여서 고시원 주소로 편지를 했다. 우리 둘에 이끌려 모의주주총회 도우미의 역할을 맡은 그는 한 달반 이상 우리 학교에 매일 출근했다. 학과 동기 40여 명이 그를 ‘브루투스’라 부르며 일사분란하게 뭉쳤다. 별명은 만화영화 <뽀빠이>에서 악당 역을 맡은 브루투스 닮은 외모 때문인데 실은 ‘올리브’를 향한 일편단심과 올리브에게 쏟는 정성을 너무 무시당하는 데에 주목해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주주총회 준비에서 ‘브루투스’는 조력자를 넘어 총 연출부터 머슴까지 온갖 역할을 도맡았다. 어느 날 영어 수업에 가기 전 연습실에 가보니 궤도를 그려야 한단다. 그런 것까지 직접 그려야 하느냐고 불평을 털어놓았다. 언제 봤다고 친한 동생에게나 부릴 투정, 푸념, 질타를 내게 퍼부었다. 마음을 가다듬은 듯 없는 컴퍼스 대용품을 찾는 듯하더니 앞에 있는 보온병을 가져와보란다. 수학 담당 아버지로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방법으로 보온병 뚜껑으로 그럴싸한 동그란 원을 만들었다.
주주총회를 마치자 죄의식에 사로잡혔다. 남학생의 3학년 가을 학기 시간을 너무 많이 뺏은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혹시 허비한 시간으로 취업 준비에 지장이 생긴 것이 아닐까. 두려움이 집어삼킬 듯 몰려들었다. 최초로 처음 둘이 만나기로 한 날. 두 학교 중간에 있는 호텔 커피숍을 약속 장소로 잡아도 선선히 그러자고 했다. 하필 그날 후원해준 후원 회사에 인사 차 다녀오라는 교수님 심부름이 잡혔다. 약속 시간에서 두 시간이 넘어도 가보긴 해야 했다. 영어 소설책 뒷부분 두 장인가를 잡고 손을 흔드는 모습은 또 다른 면이었다. 인연의 모습이 그러했으리라.
모의주주총회 준비에 성실할 수 있는 이유도 학회장을 맘에 두고 있었다는 동기들의 고언으로 알게 되었다. 학회장과, 우리 서클에서 주최한 일일찻집에서 미팅 시켜 달라는 부탁을 받고 소개한 다음 학기 써클 회장 후보 후배와의 해프닝까지. 더 나은 반려자를 찾는 그의 노력이 나쁘지 않아보였다. 이런저런 인연 찾는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의 인연에 대한 확신은 흔들리지 않았다. 학회장도 후배도 중간에 낀 내가 부담스러웠으리라. 그래 실컷 찾아보시지. 나는 찾았으니까. 결혼 말이 나오기 전까지 나와의 만남은 열 번을 넘지 않았다.
3학년 겨울방학 때 아버지가 교장으로 계신 죽산에 내려가 있는데 교장실을 통해 연락이 왔다. 서클에서 송년회를 하는데 ‘여우목도리’가 필요하니 올 수 있느냐는 내용이었다. 엄마는 여우목도리를 주며 두르고 가라고 했다. 계절이 바뀐 또 다른 봄날 학교 축제에 파트너를 대동하고 참석하라는 친구의 청에 나도 ‘늑대 목도리’가 필요하다고 만남을 청했다. 우리 학교 축제에 초청한 그를 본 내 동생의 반응은 싸늘했다. 내가 밤마다 고민하는 모습을 본 동생에게 소개하니 “흥”하고 지나쳐버린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이야기하는 냉정한 반응이다. 내게는 어찌 그리 어리석게도 일편단심을 보였던 거냐고 탓하는 듯한 남편. 냉정했더라면 일이 더 쉬울 수도 있었나 보다. 그는 1년 먼저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었다. 만남은커녕 연락도 잘 되지 않았다.
졸업 3일 후 결혼하기로 한 사실을 주주총회 담당 교수님께 알리러 갔을 때 칭찬을 들었다. “그래, 잘 어울린다.” “자네 참 잘 지내다 간다. 영어공부와 멋진 선후배 관계, 그리고 여학교 다니면서 괜찮은 사람까지 택해 결혼하는 걸 진심으로 축하한다.” 신랑이 교수님과 두 살 차이인 걸 아신다.
아들이 부산에 있는 대학에 입학 후 서클을 고민하며 물어보았을 때 우리는 주저하면서도 “TIME반 밖에 없다”고 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아들을 믿고 맡길 데라도 생긴 양 동시에. 역대급 반장을 수행한 아들이 신붓감을 만난 데 역시 TIME반이다.
남편과의 인연을 넘어 대를 이어가고 있는 TIME지는 빨간 테두리 안에 인연의 파랗고 붉은 끈을 숨기고 있던 건 아닐까. 어느 순간 그림책으로 변한 타임지의 붉은 테두리 선이 더 선명해 보인다. 그 질문? 분위기 전환을 위해 일부러 한 농담이었단다.
ESS OB 50주년 기념 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