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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도 대화의 잔털 같은    
글쓴이 : 홍정현    23-07-23 18:35    조회 : 2,139

아마도 대화의 잔털 같은

홍정현

 

내가 그 이야기를 시작한 건 박윤정의 말 때문이었다.

누군가에게 지적을 받고 나서 떠올려보면, 본격 지적을 받기 전 단계에서 예의상 깔아주는 칭찬만 각인이 되더라고요

같은 경험이 많은 나는 재빠르게 내 이야기를 꺼냈다.

 

1 , 나는 자습실을 청소하고 있었다. 마침 햇빛이 한가득 들어와 포슬거리며 날리는 먼지들을 반짝이게 했고, 열어놓은 창문으로 바람이 훅 들어와 봄 냄새를 풍겼다. 어쩌다 보니 이야기의 시작이 로맨스 드라마처럼 과장되게 덧칠이 된 것 같지만, 내 기억으로는 그랬다. 빛이 가득하고, 봄바람이 들어와 긴 머리카락이 살포시 날리고, , 청소 시간이었으니 스피커에서 음악도 흘러나왔던 것 같다.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이거나 이문세의 사랑이 지나가면이었을 거다. 아마도그랬을 거다. 빗질을 하는데 문 쪽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정현아.”

국어 선생님이 웃고 계셨다. 하회탈 같은 표정으로 나를 보시더니 갑자기 발로 내 다리를 걷어찼다.

? 낮잠을 주무시는 할아버지 콧구멍 속으로 파리가 기어들어 간다고?”

! 그 문장! 그건 내가 백일장 때 낸 시였다. 제목은 낮잠. 딱 한 문장으로 된 시였다.

 

오오!”

갑자기 이야기를 끊고 등장한 이 감탄사는 진연후의 목소리였다.

오오! 시가 멋있어.”

연후의 이런 반응은 뜻밖이었다.

? 진짜?”

나는 다음 말이 궁금했다.

낮잠이라는 단어가 주는 한가함, 여유, 이런 것들이 할아버지 콧구멍으로 들어가는 파리 모습과 어울려. 콧속으로 파리가 기어들어 가는데,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자고 있잖아. 그건 파리가 아니라 무엇이든 할아버지의 낮잠을 방해할 수 없다는 거지. 할아버지, 파리, 콧구멍 세 단어가 잘 어울려서 나른한 오후 모습을 잘 담고 있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칭찬이었다.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사실 나는 친구들과 놀고 싶었거든. 그래서 대강 한 문장으로 쓴 거였어.”

시간을 들여 구상해서 쓴 게 아니었다. 정말 그랬다. 하지만 대충 쓰더라도 그런 티는 낼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문예반이었기 때문에. 문예반으로서 체면은 구기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아주 잠시 고민하다 한 문장으로 휙 써서 제출했다.

대강 썼다는 내 말에 연후는 이렇게 말했다.

진짜? 반전인데?”

이 역시 내 귀에는 칭찬으로 들렸다.

 

칭찬은 여기까지. 성격이 급한 나는 얘기를 빨리 끝내고 싶었다. 자습실 그 기억 속에서 국어 선생님은 내 이름을 불렀고, 웃으며 내 다리를 찼고, 내 시를 읊었고, 나를 혼냈고, 계속 웃으며 자습실을 나가셨다. 그때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에 없다. 아마 나도 말없이 웃고 있었을 거다. 다리를 차였는데도 말이다.

나는 청소를 서둘러 마무리하고 바로 교실로 가 호들갑스럽게 친구들에게 외쳤다.

국어 선생님이 내 이름을 알아! 심지어 내 시까지 외우고 있어! 이히힛.”

첫 국어 시간, 양복에 분필 가루를 잔뜩 묻힌 채 칠판에 기대서서 우리를 보고 웃고 있는 국어 선생님을 보며 저 사람을 내가 좋아하겠노라고 결심했고, 아직은 서먹서먹한 주변 친구들에게 이것을 선포한 후, 바로 선생님을 좋아하는 티를 마구마구 내고 다녔다. 우리 반은 물론이고 다른 반 애들과 다른 선생님들도 다 알 정도로. 이건 이 이야기의 주제와 상관없는 내용인데, 문예반 담당 선생님이 흘린 정보에 의하면 국어 선생님은 당시 신혼이었고, 부인이 문예반 선배라고 했다. 문예반 선생님은 날 보시며 이렇게 말했다.

꼭 너같이 선생님을 쫓아다녔지.”

잠시 이탈한 주제를 다시 잡아다 정리하자면 이런 거였다. 박윤정처럼 나 역시, 선생님에게 꾸중을 듣는 순간에도, 혼나고 있다는 사실보다 선생님이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에만 집중해 정말 기뻐했다는 것.

비슷한 에피소드가 하나 더 있는데, 이것도 고등학교 때 얘기야. 담임 선생님이 성적이 팍팍 떨어지고 있는 나를 불러서 혼을 내시며.”

하지만 이 이야기는 파도처럼 자연스럽게 밀고 들어온 한복용의 말로 끊어지고 말았다. 대화는 사뿐히 다른 주제로 건너뛰었다. 담임 선생님과의 일화가 끊겨 조금 아쉬웠지만, 아쉽다는 감정은 빼꼼히 나오려다가 바로 퇴장했고, 나는 한복용의 이야기에 빠져들어 진짜?”, “.” 등의 격한 반응을 보이며 집중했다.

 

우리는 그렇게 세 시간을 떠들었다. 그동안 참았던 대화의 욕구가 빵 터져 나와 소리 내어 말을 하고 친구의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마냥 재미있었다. 코로나 사태로 1년 반 만에 만났다. 장소는 대학로 스타벅스. 모인 인원은 당시 정부 방역 지침을 준수해서 4. 모두 수필가였다. 우리의 수다는 잔털처럼 나풀나풀 자유롭게 떠다녔다. 신나게 이야기하고 큰 목소리로 맞장구치고 그러다 끼어들어 말을 끊기도 하고 뜬금없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가 갑자기 칭찬하는 식의 대화. 이런 수다는 비대면으로는 불가능하다. 고립된 일상에서 우리가 가장 그리웠던 건 얼굴을 마주 보고만 할 수 있는 잔털같이 가벼운 수다가 아니었을까?

 

아마도 내가 먼 훗날 이날 모임을 기억하게 된다면 그건 다 연후의 칭찬 때문일 거다. 기억이란 녀석은 칭찬을 받으면 그것을 반짝반짝 닦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진열하니까. 30년도 훨씬 전에 쓴 시로 칭찬을 받은 것은 사실 여부를 떠나, 길을 가다 무심코 노점상에서 마음에 쏙 드는 귀걸이를 발견한 것처럼 기분 좋은 일이었다.

, 그리고 그때 자습실에서 국어 선생님은 진짜 나를 보며 웃고 있었을까? 다시 생각해보니 화를 내셨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 순간을 기억하는 사람은 나뿐이니(선생님도 기억 못 하실 거다), 진실은 알 수 없다. 그냥 웃었다 하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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