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에와 명예
오길순
기어이 간병을 고집하시던 영감님 입원실에서였다.
“금년에는 조상님 제사를 다 잊었구나.”
한숨처럼 혼잣말을 하시던 시어머니께서 한 사날 후 영면 하실 줄 아무도 몰랐다. 칠십년 가까이 모셨을 봉제사에서 단 한번 벗었을 멍에. 그 거룩한 명예를 건망증으로 풀고는 영감님보다도 먼저 천국 길 훨훨 날아가셨다.
열일곱 살 소녀가 꽃가마에서 내다 본 세상은 어떠했을까? 열여섯 살 새신랑과 여섯 남매들이 올망졸망 기다릴 줄. 세 따님을 낳고서야, 하늘이 조금 보였을까? 이후 넷이나 되는 아드님들이 종부의 명예를 지켜준 훈장이었다.
서너 벌은 되는 제기를 두어둔 이민가방에 정리하다보니 시어머니 영정사진이 새삼스럽다. 홍조를 띈 두 볼 아래 헤아리기도 어려운 뜻이 주름으로 깊어 보인다. 달관한 듯 체념한 듯, 맑은 눈 속에 깃든 수심은 무엇일까? 벌초며 측간청소며 땔 나무까지 해 나르느라 슬퍼할 틈도 없었을 분. 한 지게는 될 제기가 태산 같았을까? 등이 땅에 닿도록 헌신하고도, 더 못 주어 그리 근심이셨을까? 그러고 보니 기뻐도 고개만 저으실 뿐, 웃으시는 모습을 뵌 기억이 없다.
커다란 이민가방에 제기를 보관한 것은 신의 한 수다. 무거운 수고는 이제 끝이다. 네 개의 바퀴가 달린 가방 손잡이만 잡으면 바퀴가 스르르 앞장선다. 그 옛날 임금께 헌공까지 했다는 청실리(靑實梨)배처럼 상냥해서 착한 동서 하나 더 만난 듯, 웃음이 나온다.
제기가 내 것이 된 것은 시어머니께서 영면하신 후였다. 산수를 진즉 넘기고 이승을 하직할 때까지 남원 특산 제기가 그 분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었다. 이십여 년 전, 누군가 “네가 주인”이라며 그 것을 자동차에 실어주었을 때, 그 즈음 교통사고로 숨만 붙어 있던 나는 이 거룩한 명예를 잘 지키리라 다짐했었다.
다시 그 순간이 온다면 이름이 종부가 아니라고 말하고도 싶다. 내 이름은 못 난 ‘오길순’이라고 떼를 써보고도 싶다. 한 달에 여러 번 제사를 치를 때는 가야고분에 순장된 소녀의 마음이 이럴까 싶었다. 먼 해외여행은커녕 긴한 만남도 포기한 채, 다리가 휘어지도록 제상을 차리노라면 밴댕이처럼 가빠진 숨결이 스스로 부끄러웠다.
남편은 제사 때마다 제기상자를 2층에서 내려왔다. ‘남원’이라는 글씨조차 찢어진 종이상자를 어깨에 멘 채 함부로 쏟아질까 조심을 다했다. 그래도 무겁다는 말은커녕 태생이 종손이라는 듯, 이름이 장남이라는 듯, 유구무언이었다.
서너 세대가 흐르는 동안 제기도 상자도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산과 집으로 혹은 이웃집 대사에 불려갔다 온 종부의 눈물콧물인 듯도 하다. 접시꽃 같았을 새댁이 구기자꽃처럼 쇠잔해져도 운명이라며 굴복했을 위대한 종부들. 세월에 씻긴 나이테는 삿된 말씀조차 손사래 쳤을 시어머니들의 속가슴인 양 벌어진 상처조차 퇴색되었다.
어디 양반 고을 종부는 평균수명이 훨씬 짧다고 한다. 이민 가방을 끌고 외국으로 떠나도 문신처럼 지워지지 않을 그 이름 종부. 옛 사람 ‘살림 따라올라’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가더라니, 나도 보호막 같은 시어머니가 아니 계셨던들, 한 번 쯤 뒤돌아 뛰었을지도 모른다.
결혼 할 나이 즈음, 친정어머니는 내게 조용히 이르셨다.
“얘야, 장남은 힘들다. 너는 장남한테 절대 시집가지 마라. 서울 아줌마 봐라. 제일 높은 대학 나왔다고 해도 큰 일 때마다 밤새 혼자 일하더라.” 어린 내게서 종부가 예감되셨던가.
창세기 롯의 아내는 결국 소금 기둥이 되었다. 천사가 돌아보지 말라는 소돔을 돌아본 때문이다. 친정어머니가 기어이 주저앉혔더라면 망부석이 되었을까? 훗날 외동며느리인 당신님 팔자가 종부인 딸보다 백번 낫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친정아버지는 제삿날이면 더욱 경건하셨다. 하얀 동정을 갓 달은 두루마기 자락을 공손히도 거두시며 조상이 앞에 계신 듯 무릎을 꿇고 정성껏 술잔을 올리셨다. 그럴 때면 유난히 등이 외로워보였다. 그 때마다 나는 대가족을 꿈꾸었다. ‘번족한 집안에 시집가서 제사도 번족하게 지내야지.
생각이 씨가 되었는지 번족이 넘쳤다. 명절이나 제사 때면 왕복 하루가 걸려도 천리를 달렸다. 원시적인 화장실도 정다웠다. 삼십호 쯤 되는 경주김씨 남편의 집성촌이 그저 좋았다.
그 길은 늘 기쁨의 길이었다. 버선발로 뛰어나오실 시어머니를 떠올리면 자동차 속력
이 더뎠다. 당신의 운명을 대물릴 여성이라 그리 덥석 손잡아 반기셨을까? 동네 친척
여인들을 방안가득 모아놓고는 꼭 한 말씀 하셨다.
“나는 큰 며느리 그림자도 밟으면 안 된다네...”
그 거창한 말씀은 삼십 년도 넘어 내 아들이 결혼한 후에야 어렴풋이 짐작되었다. 아침마다 넥타이를 골라주고 양말을 빨아주며, 평생 밥상을 차려줄 며느리. 제 남편이 급하다면 발통을 단 듯 달려갈 사람. 곁에 있다면 큰 절이라도 하고 싶은 소중한 며느리.
시어머니는 늘 검정 남자 고무신을 신으셨다. 작고 고운 발이 뛰는데 안성맞춤이었다. 언젠가 우물가에서 미끄러졌을 때 그대로 주저앉고 싶지는 않으셨을까? 조상님 노하실까, 원망조차 삼가셨을 터. 그러기에 백년 씨간장이 하늘을 품고 사철 정화수가 장독대를 맑혔다.
제상은 늘 푸짐했다. 가마솥에 여러 번 쪄낸 생선광주리며, 오일장에서 사온 크고 좋은 과일들. 콩나물은 죽순처럼 잘도 자랐다. 나무절구에 손수 친 인절미는 늘 차지고 부드러웠다. 초상집 수의까지 주관하던 솜씨장이는 친척들과 음식 나누는 게 일생의 낙이셨다.
어느 해 떡시루 앞에서 불을 때는데, 나지막이 말씀하셨다.
“내 생전에는 절대로 네게 제사를 안 물려줄란다. 사는 날까지 내가 책임질란다.”단호히 말씀하셨다. 이리 힘든 걸 며느리에게 물려주겠느냐는 듯, 끝까지 책임질 것을 선언하셨다.
“직장 다닌다고 너만 여자냐? 이제 네 밥도 얻어먹어 보자. 제사도 가져가거라.”
호랑이 시어머니처럼 호령하실 법도 하련만 오히려 사랑을 고백하신 거룩하신 종부 정재임여사. 내 나이 고희를 넘기고서야 그 분의 눈동자에 깃든 무심의 깊이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누가 눈치 챌까, 바다보다 깊은 愁心을 유난히도 맑은 눈동자 속에 묻어버렸을 달관의 한 생애. 나도 물려주지 않으련다. 종부의 명예는 내게서 끝이다.
『월간문학』 202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