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에 여느 때처럼 책상에 앉아 끼적거리고 있었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 있는지 소파에서 TV를 보던 아내가 나간 모양이다. 아내는 밖에 나갈 때 “어디를 간다”라고 확실하게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어제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고, 현관 여는 소리가 났으니 그저 ‘문밖에 있는 작은 창고에서 무언가를 가져오려는구나’라고 짐작했다. 창고에서 물건을 가져올 때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나 나를 불렀으니까. 그래서 내다보지도 않고 끼적거리는 일을 계속하였다. 아내가 나가는 데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한참 후 현관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거운 것을 들고 온다고는 상상도 하지 않고 무심하게 ‘들어오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끼적거리는 것을 잠시 멈추고 책상에서 일어나 거실로 가니 아내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내가 나온 걸 보고는 “열이 나니 체온계를 가져다 달라”라고 말했다. 그런데 나는 정확히 알아듣지 못해 “뭐라고”라며 물어보며 우물쭈물했다. 아내는 답답한 듯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그것을 직접 찾아서 체온을 쟀다. 나 역시 영문도 모르고 짜증스러워하는 태도에 속으로는 화가 났으나 아무 소리도 안 하고 꾹 참았다.
아내의 체온은 그리 높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그러나 힘들어했다. 이유를 몰랐어도 더는 물어보지 않았다. ‘요즘 코로나 핑계로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무시하나’라는 자격지심에 ‘왜 그러지’라는 정도의 생각으로 그냥 지나쳤다.
그러다 오늘 오후에 우연히 베란다에서 커다란 무 4개를 발견했다. 보기만 해도 꽤 무거워 보였다. ‘어제 아내를 힘들게 했던 게 바로 이놈들이구나’라는 생각에 쓴 웃음이 나왔다. 화장실에서 샤워하고 나오니 인기척이 들렸다. 잠시 외출했던 아내가 들어와서 무언가를 하기 위해 부엌 쪽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 사이 베란다에 있던 무들은 식탁 위로 옮겨져 있었다.
“그 무거운 걸 들고 오려면 나한테 같이 가자고 하지 그랬어?”
“두통약을 사러 약국에 갔는데, 튼실한 무가 보이길래 그냥 산 거야.”
“들고 오면서 무거워 죽는 줄 알았어.”
“비가 와서 한 손에는 우산을 들고 있어서 더 힘들었어.”
아내의 말을 듣고야 상황이 이해되었다. 비가 오고 나면 채소 가격이 오른다. 힘들게 들고 와도 가족을 위해 풍성한 식탁을 꾸미는 게 아내의 마음이며, 엄마의 즐거움이니 그런 행동이 가능했으리라. 나이가 들어서는 평소에 무거운 물건을 사기 위해 시장이나 마트에 갈 때는 나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혼자 갔다가 갑자기 무거운 무를 샀기에 힘들게 낑낑거리며 들고 온 것이다. 어제 아내를 짜증스럽게 만든 범인은 바로 ‘무’였다.
아내를 힘들게 했던 무들은 이제 반대로 아내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식탁 위에 놓여있는 무는 깍두기가 될 운명이다. 잠시 후 아내의 솜씨가 발휘되었다. 현란하고 능숙한 칼 놀림으로 무는 먹기에 적당한 크기로 조각났다. 이어서 다듬어진 부추와 고추, 마늘 등 양념과 함께 큰 그릇에 담겨 버무려진다. 하루 정도 후면 새콤하고 시큼한 맛을 내는, 빨간 깍두기가 될 것이다. 입에는 침이 고인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새삼 아무리 부부라도 ‘적시에 정확하게 소통하지 않으면 엉뚱한 오해가 생기고 원망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교의 가르침에 ‘이심전심’이니 ‘염화시중 또는 염화미소’니 하는 고사성어가 있다. 말이나 글에 의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의 경우, 아무리 오랫동안 함께 산 부부라 해도 말을 하지 않으면 상대의 마음을 완전히 헤아리기는 불가능하다.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말도 있고 ‘척 하면 삼천리’라는 말도 있지만 표현하지 않으면 다 무용지물이다. 사람은 누구나 상대방과 소통할 때 자기가 믿는 방식대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설령 부부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면에서 아내가 나가는 데 신경을 쓰지 않은 건 그렇다 치고, 들어와서 힘들어하는 걸 보고도 어떻게 된 것인지 제대로 물어보지 않은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걸까?
정말 ‘무’만 범인일까?
<삶의 온도는 따뜻한가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