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외출
봉혜선
갓 긁은 따듯한 누룽지나 반찬이 식을세라 줄달음질치며 엄마에게 가는 길에 회색 옷을 입은 ‘할머니’들과 마주치곤 한다. 천천히 걷거나 절뚝이며 걷거나 지팡이를 짚었다. 더러 유모차를 밀며 모여들기도 한다.
유모차를 뗀 손주를 둔 할머니라면 하나같이 다리가 시원찮아지는 것일까. 유모차 크기나 모양이 요즘 유행하는 고급스런 것과는 거리가 먼 것도 동일하다. 아기들이 들어 있어야 할 자리가 막힌 것도 공통이고 몸부림치는 아기를 감당하기에는 가벼워 보인다. 엄마 옷에서는 전혀 찾을 수 없는 무채색 계열의 헐렁한 옷차림으로 정해진 출근 시간이라도 있는 것처럼 노인정으로 향하고 있다. 다리가 아프다며 엄마가 집에서 나오지 않는지 5년이 넘었다.
엄마를 임신했을 때 할머니가 열병을 앓으셨다. 엄마는 큰 키와 긴 다리에도 뛰거나 달리는 운동은커녕 학교 조회 시간에 쓰러지기가 일쑤였단다. 할머니가 학부모 대표를 맡고 있었던 영향이었을까. 긴 다리 덕이었는지 엄마는 배구팀, 농구팀에서 러브콜을 받았다고 했다. 투포환 대표 선수로 전국대회에 나갔다는데 엄마는 정작 그런 사실을 거의 말하지 않았다.
우리 남매가 아는 엄마는 성악 소프라노 파트를 맡아 무대에 올랐을 때 가장 빛이 났다. 엄마의 다리는 굽 높은 구두와 성장한 차림에 잘 어울린다. 작고 통통한 나와 비슷한 체형인 여동생이 대학에 들어간 후 셋이 만나는 자리에 초록색 맞춤 정장한 엄마가 신고 나온 반짝이 달린 초록 스타킹은 잊히지 않았다. 속옷도 같은 색 계열이리라는 추측도 언제나처럼 틀리지 않았다.
엄마가 자랄 때 의상실에 새 천이 들어왔다는 소식은 엄마네로 제일 먼저 도착했다. 일본 유학파 할머니는 맏딸인 엄마와 함께 시내에서 맨 먼저 옷을 맞춰 입으셨다. 엄마의 늘씬하게 뻗은 긴 다리를 아담한 키의 할머니가 자랑스러워했으리라.
나와 키가 거의 비슷한 엄마의 다리에 대해 새삼스런 생각을 한 건 대학에 들어간 후였다. 스무 살을 어른이라 생각해 엄마 옷을 입어도 된다고 여기고 엄마 치마를 입었다. 엄마 무릎 위에 오는 치마는 내게는 무릎을 덮는 어정쩡한 스타일을 선사했다. 엄마는 내 종아리에 피아노 치던 긴 손가락을 대 뼘을 재더니 “다리가 이렇게 짧아서 결혼을 할 수 있겠나.”며 걱정 섞인 혼잣말을 했다. 어떻게 해야 길어지냐는 물음에 “글쎄, 우유를 먹으면 길어지려나.”라는 애매한 답이 돌아왔다. 닮게 길게 좀 나아주지 않고... .
아버지 퇴직 후 부모님은 내가 사는 동네로 이사 왔다. 엄마와 15년 동안 같은 수영장에 다녔다. 나는 엄마 덕에 멀리 계시거나 돌아가신 엄마가 생각난다는 딸들에게나, 딸이 그리운 어른들께‘효녀’라고도 불렸다. 엄마가 25미터 레인을 숨 한 번 쉬지 않고 갔을 때의 충격은 오래 갔다. 우아하게 물을 헤치는 모습은 한참 재미 붙었지만 힘으로 하는 나와는 너무도 달랐다. 같은 레인에서 엄마와 하는 수영에 재미 붙이자 ‘탱크’로 불릴 만큼 내 실력이 자꾸 늘었다. 오래 수영한 나이든‘언니’들이 포진해 있어서 1레인에 진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이와 경륜을 무시하고 실력 순으로 반을 재편성하자고 주장해‘싸움닭’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지만 힘을 빙자한 실력으로 다 무마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은 엄마라는 뒷배를 믿었기 때문이다.
엄마에게 미안했지만 서로 다른 레인으로 떨어졌다. 나이 든 팀에 섞인 엄마가 한 바퀴를 돌지 않은 체 한 번 가면 끝에서 쉬고, 오면 쉬는 횟수가 늘었다. 자꾸 쉬는 모습이 다른 회원에게 좋게 느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수영이 끝나면 같은 레인 회원끼리 모여 앉아 쉬곤 한다. 엄마가 있는 레인 모임에서 걷기보다 차타기를 좋아한다고 걱정하면서도 번갈아 엄마를 모셔다 드렸다. 가다가 밥 사기는 엄마의 특기가 되었고 밥을 먹은 회원들 사이에서 경쟁적으로 엄마를 모셔다 드렸다. 엄마는 내 걱정은 아랑곳 하지 않고 수영하느라 힘드니 차 타는 걸 자연스러워 했다. 옛적 대가 댁 아기씨처럼.
80세 된 새해 첫 날이 되자 엄마는 갑자기 걸음을 걷지 못하겠다고 했다. 80이라는 새로운 나이가 주는 두려움이라 생각했다. 겨울엔 추우니 수영장에 다니기는 아침에 운전해주는 아버지에게도 무리이지 싶어 가볍게 넘겼다. 아버지에게 엄마와 같이 걷거나 스트레칭을 같이 해보라고 말해도 먹히지 않는 소원이었다. 아버지에게 왕비였던 엄마. 아버지는 엄마가 다니던 은행 앞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붙박이로 기다리던 정성으로 간신히 결혼했다고 했다. 이모·삼촌의 선생님과 학부모 자격으로 만난 두 분의 결혼 조건은 단 한 가지였다. ‘목욕 가서 너무 오래 있다 오지 말 것.’ 목욕 간 사람을 기다리느라 아버지가 엄마 집에서 기다리며 꽤는 애를 태웠나 보다. 덕분에 이모들의 성적은 올랐겠지만. ‘유학도 안 다녀왔다’고 외할아버지께 미움 받은 아버지는 유학파 양반집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사위답게 엄마를 여왕 모시듯 했다. 성실한 남편이지만 운동 동반은 못하시는 이유라고 넘겨짚었다.
엄마는 봄이 되어 꽃구경을 나가자 해도 귀찮다고, 많이 봤으니 더 이상 보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다고 했다. 부처님 오신 날 즈음이면 등꽃을 사야 한다 했고 가을이면 국화 분을 사러 가자고 하던 엄마다. 거리에 지천으로 걸린 화분이 보기 좋다며 집에 들이자던 엄마의 베란다를 상기시켜 보아도 소용없다. 꽃을 사러 나가자는 말에도 엄마는 집에 갇힌 듯 나오려 하지 않았다. 지팡이는 아니더라도 자연스럽게 보이니 우산을 짚고 다니자고 제의해도 엄마는 그런 모습으로는 못나간다고 했다. 평생 지켜온 패셔니스타의 면모를 고수하고자 했던 엄마는 그렇게 약해져 갔다.
엄마네로 가는 길 신호등 앞 건널목이다. 노인들이 천천히 걷는다. 아니다. 느리다. 건널목 신호가 깜박거리는데도 달리지 않는다. 빨라지지 않는다. 택시와 트럭은 도망가고 남아있지 않다. 숨 막힐 듯 급한 버스도 부르릉거리며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얼른 가서 짐을 들거나 붙잡아 건네주고 싶은 건 마음 뿐, 다 건너온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못 박히고 만다.
천천히 혹은 느리게 걷는 분들이 부럽다. 손가방을 대신하는, 의자가 달린 보행 보조기를 밀고 노인정에 가는 어른들의 발걸음이 부럽다. 절뚝이거나 지팡이 짚고 걷는 분들이 부럽다. 손과 발의 리듬이 맞지 않은 사람들, 허공을 짚는 발걸음으로 짐을 들고 가는 백발의 어른, 장 본 물건을 바퀴 달린 가방에 담아 의지하듯 걷는 힘겨운 모습, 버스 정류소 의자에 몸을 부리고 쉬는 어른들, 아파트 경계석이나 나무 아래에 잠시 쉴 자리를 빈 노인들이 부러운 내 눈길에 계속 들어온다. 누군가가 밀어주는 휠체어에 타고 앉은 모습도 나의 부러움을 산다. 전동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모습은 운전을 잘 하는지 여부를 떠나 독립적이고 자발적으로 보인다. 허리가 접혀 기역자로 구부러진 모습으로 나와 걷는 모습도 내 시선을 잡아맨다.
볕에 손등이 탄다고 손바닥을 돌리고 걷던 엄마의 높은 하이힐이 멋져 보였지만 따라 하기는 힘들겠다고 생각하던 내 눈에 들어오는 노인들의 모습이 정말이지 부럽다. 거리에 나서서 ‘활기찬’걸음을 내딛는 어른들 위로 비타민 D가 한껏 내리비친다. 나서기만 한다면 뼈를 단단하게 한다는 햇볕이 저렇게 따스하고 다정하게 치료해 주련만. 엄마가 휠체어에 앉을 수만 있어도.
사슴 다리처럼 멋진 다리가 늘그막에 엄마의 발목을 잡았다. 다리 통증을 겸한 엄마의 약한 하반신이 오늘 나의 발목도 잡았다. 엄마와는 다른 짧고 굵은 다리를 놀려 엄마에게 가고 있는 나를 멈추게 하는 건 거리에 나선 노인들의 구부정하고 비틀거리는 걸음이다. 안고 있는 누룽지가 다 식어버릴까 가슴을 부여잡는다.
봉혜선
ajbongs601318@hanmail.net
한국문인협회 회원
지금 뭐 하니? 라는 질문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제자리를 찾아 앉아 바쁜 건 ‘현실 중독’이다.
<<한국산문>> 2023,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