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써 말 많으니
윤기정
동네 학습 동아리에서 알게 된 사람의 푸념이다. “주말에 손자가 왔는데 어찌나 땡깡을 부리는지….” ‘땡깡’이란 말이 귀에 거슬렸다. 손자가 무슨 일로든 떼를 좀 썼던 걸게다. 그냥 넘어가지 못했다. “이형(兄). 귀여운 손자에게 ‘땡깡’이 뭐요? 알만하신 분이.”여러 해 알고 지냈고 그만 말로 노여워하지 않을 사람이기에 웃으며 한 마디 건넸다.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는 표정의 시선에 “그거 왜(倭)말인데 간질(癎疾)병이라는 뜻인가 봅디다.”라고 일러주었다. 반응이 뜻밖이었다. “뭐 사전에도 있는 말인데…”라며 그는 대수롭지 않은 일에 나서서 아는 척하지 말라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국립국어원이 만든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았다. 표제어로 올라있지 않았다. 일부 사전에는 (〔일본어〕tenkan 〔癲癎〕) ‘생떼’를 속되게 이르는 말.(경상) 이라고 풀이해 놓았다. 여러 사전과 일본어를 어원으로 하는 우리말을 연구한 이윤옥이 2010년에 낸 『사쿠라 훈민정음』을 보면 ‘땡깡’의 어원이 일본어이고 우리나라 남부 지방에서 쓰는 말이라고 풀이했다. 그 말이 정설로 보인다. 어느 쪽이던 ‘떼, 생떼’라는 우리말이 있는데 굳이 귀여운 손자에게 쓸 말은 아니지 않은가? 말의 기능은 의사소통이 첫째일 것이다. 의사 표현이 제대로 되어야 의사소통이 바르게 이루어질 것은 너무나 뻔한 일이다. 글에 문법이 있듯 말에는 어법이 있는 까닭이다.
문법이나 어법에 맞지 않거나 어휘의 뜻을 바로 알지 못하고 사용하는 이들을 보면 그냥 넘어가지 못한다. 버스나 전철 안에서 만난 사람의 일이라면 나설 이유가 없다. 친분 있는 사람이라도 상대편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판단하는 일이 먼저다. 판단이 매번 들어맞지는 않지만. 알아들을 만한 상식과 품성을 갖춘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말을 꺼냈다가 “아, 말만 통하면 되는 거 아니요?”라며 아래위를 훑어오는 눈길을 받으며 무안한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입이 방정이야. 공연히 국어 공부해서는. 왜 귀에 들려가지고는….’야속한 심정보다 속상하고, 속상해서 자책하곤 했다.
몇 년 전 글공부 같이 하던 문우 한 사람이 잘못 쓰고 있는 외래어 발음과 표기에 관해서 발표했다. ‘플래카드’라고 해야 할 것을 ‘플랭카드’로 읽고 썼음을 그때야 알게 되었다. 스펠링 p-l-a-c-a-r-d 어디에도 ‘-랭-’으로 발음할 음소가 없었는데 습관처럼 ‘플랭카드’라고 읽어 왔다. 주변에 여전히 ‘플랭카드’로 읽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런 이들을 보면 앞서 밝힌 상식과 품성을 갖췄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는 ‘플래카드’가 맞는 말이라고 알려주고 있다.
양평으로 처음 이사 했을 때의 일이었다. 선후배 몇이 집을 찾았다. 누군가가 “겨울에 춥지 않으냐?”고 묻기에 ‘볕 양(陽)자가 들어간 동네라 따뜻하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후배 하나가 ‘버드나무 양(楊)을 쓰는데요.’하는 게 아닌가? 그랬다 ‘양평(楊平)’은 ‘양근(楊根)’과 ‘지평(砥平)’에서 한 글자씩 딴 지명이었다. 무지를 드러냈기에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러준 후배가 고마웠다. 내 기준에 비춰보자면 ‘알아들을 만큼의 상식과 품성’을 갖춘 선배로 봐 준 것 아닌가?
말이 나온 김에 양평의 겨울에 관해서 짚고 넘어가자. 어느 해 겨울 소주병이 얼어 터졌다는 뉴스 때문에 양평의 겨울이 별나게 추운 줄 아는 사람들이 많고 나도 그랬다. 서울보다 기온이 낮은듯하지만 맑은 공기가 주는 청량감 때문일 것이다. 소주병이 얼어터진 곳은 양평에서도 강원도 가까운 동쪽 끝 ‘산음(山蔭)’, 이름부터 한기가 도는 마을이었다. 양평 전체로 보면 볕 양이 아니라도 특히 춥지는 않은 편이다. 그 해에는 전국이 유난히 추운 겨울 아니었던가? 당시 뉴스를 접한 사람들에 의해서 일반화의 오류가 일어난 게 아닌가싶다. 말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면 의미 체계에 혼란이 일 테니 주의해야 할 일이다.
개념에 맞지 않는 어휘나, 문법에 어긋난 문장을 짚어줄 때 보이는 반응은 여러 가지다. 말 뿐 아니라 표정까지 고마워하거나, 턱을 슬쩍 들며‘그래요?’ 반문하듯이 불쾌감을 드러내거나, 그렇지 않다고 억지 부리는 세 가지 반응을 많이 볼 수 있다. 뒤의 두 경우에서는 ‘너나 잘해.’, ‘니가 알면 얼마나 안다고?’라는 적의마저 느낄 때도 있다. 내가 그런 지적을 받았을 때 상대의 말하는 태도가 무례하면 말이 맞아도 불쾌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런 마음을 알기에 남에게 이야기할 때는 조심하는 편이다. 지적 자체를 불쾌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조심도 소용이 없기는 하다. 들을 때 내색하지 않고, 말할 때 조심하지만 결과는 대개 불유쾌하다.
여러 반응을 두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감정 상하면서까지 할 일인지, 좋은 게 좋다고 지나치는 것이 옳은지 판단하기 어렵다. ‘말로써 말 많으니 말 않을까 하노라’는 시조도 ‘침묵은 금’이라는 서양 격언도 다 이유가 있어서 생긴 말일게다. 그 뜻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당장 고쳐지지는 않을 것 같다. 왜? 직업병? 눈치 없음? 오지랖? 천성? 아니다. 욕 많이 먹으면 오래 산다는 속설 때문에 오래 살려고? 그건 더 아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섞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보다는 문법도 법이니 지켜야 한다는 것이 이유다. 법은 사회를 지키는 최소의 규칙이고 문법과 어법은 언어생활의 혼란을 막는 최소의 규칙이기 때문이다. 아무려나. 말도 문법도 생명이 있어서 지금 어긋난 말이 생명을 얻어 훗날에는 말법에 맞는 말이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지금은 지금이다.
<양평이야기 8>, 2023.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