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앙하니까, 앉아 있을게요
‘…이 노래는 교수님이 쓰라 해서 쓰는 노래. 솔직히 대충 만들었네… 교수님, 죄송합니다.’
이무진이 부른 「과제곡」이라는 노래 가사이다. 소설반 과제 마감 시간을 코앞에 두고 자판을 두드리는 지금, 내 귀에 이 노래가 들리는 듯하다.
‘나에게 소설이 무엇인가, 또는 왜 소설을 쓰고 싶은가’라는 주제의 에세이를 쓰는 게 이번 과제이다. 내게 이 질문은 ‘네가 왜 거기(소설반)에 앉아 있어?’라고 묻는 것과 같다. 정말 하기 싫은 숙제다. 왜 이곳에 앉아 있는지, 소설이 내게 무엇인지 차근차근 사유하고 그것을 설득력 있게 쓸 ‘의지’가 내게는 없기 때문이다. 내가 꾼 악몽 이야기를 해야겠다.
밤의 도시, 나는 그 위를 날고 있었다. 날 수 있다는 것에 의기양양해져서 점점 더 높게 올라갔다. 발아래를 내려보니 도시의 불빛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도시는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처럼 보였고 죽어 있는 듯 조용했다. 순간 그 고요함에 겁이 났다. 그곳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다. 도시는 내가 만든 세상, 내가 지은 가짜 도시라는 걸 깨달으며 잠에서 깼다.
수필을 쓰는 사람으로서 요즘 내 상황, 정확히는 내 감정이 이 꿈과 비슷하다. 아무도 살지 않는 빈 도시의 껍데기 불빛을 바라보는 심정. 처음에는 그저 쓴다는 행위가 즐거워 의기양양하게 쓰다가, 어느 순간 보니 내 수필 속엔 바람만 가득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바로 무기력해졌다. 혼란스러웠다. 그냥 고개를 돌려 딴짓을 하며 모른 척하고 싶다. 이런 외면의 태도가 나의 문학적 태도의 본질이 아니었을까, 본질이 얄팍한 내가 무엇을 쓴다는 게 옳은 걸까? 의심이 든다. 의심 속에서 나는 문학에 관한 사유의 ‘의지’가 부족하다. 하지만, 일단 이 글을 쓰기로 한다.
어려서부터 ‘말’들이 떠올랐다. 여기서 떠올랐다는 것은 ‘생각이 났다’는 게 아니라, ‘솟아서 위로 올라왔다’는 걸 의미한다. 내가 처한 상황과 무관한 문장들이 갑자기 툭 올라왔다는 게 정확할 거다. 말들은 탄산수의 기포처럼 보글보글 떠올라 내 목을 간지럽혔다. 이런 말들은 대체로 이미지를 그리고 있었는데, 그것 중 일부는 매우 생생해서 기억에 아예 말뚝을 박고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마치 실제 경험한 일 같이….
성인이 되어서는 어느 정도 사회화 학습이 된 탓에 말들이 떠올라도 그냥 흘러가게 두지만 어려서는 여러 방법으로 그걸 표현하고 싶었다. 그 방법의 하나가 ‘글’이었다. 나의 글쓰기는 그렇게 시작된 것 같다. 떠오른 말들을 기록하는 일. 타고난 끈기가 부족한 탓에 내가 쓴 글은 그저 짧은 ‘쪼가리’였다. 길게 쓰려고 해도 노트 한 페이지를 넘기기 힘들었다. 그렇게 나는 계속 쪼가리 글을 썼고, 겁도 없이 이것을 ‘시’라고 불렀다. 하지만 내가 뱉어내는 시는 그냥 자투리 조각일 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행과 연을 갖추고 대충 시를 흉내 낸 쪼가리 글. 상관없었다. 그냥 재미있으니까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 시절 나에게 소설은 어떤 존재였을까. 고등학교 생활기록부 사본이 있는데 그걸 보면 1, 2, 3학년 희망 진로란에 모두 ‘소설가’라고 쓰여 있다. 물리를 좋아하는 이과생이며 재미로 끄적끄적 시를 쓰고 있는데, 희망 직업은 소설가라니. 생활기록부를 보고 처음에는 이게 뭔가 싶었지만, 기억을 뒤져보니 왜 그렇게 썼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냥 제일 멋있다고 생각되는 직업명을 적어서 냈을 뿐이었다. 내가 꿈꿀 수 있는 직업의 가장 최고 위치에 있는 직업. 희망으로만 끝날 게 뻔하지만 뭐 어때, 희망 직업을 쓰라니까 그냥 써서 내자, 이런 마음이었다. 내 가슴 속엔 ‘거룩한 방’이라 부르는 공간이 있는데, 그 방문을 열면 고풍스러운 테이블 위에 ‘소설’이 고이 모셔 있었던 거다. 당시 나의 영웅은 김승옥이었고, 그 뒤로도 많은 소설가가 내게 와서 영웅이 되어 주었다. 그러니까 나에게 소설은 소중히 아껴야 하는, 거룩한 존재였다.
그 후 대학에 가고 직장을 얻고 결혼하여 육아에 집중하면서 쓰는 일은 나와 무관한 것이 되어버렸고, 독서는 좋아하는 작가 책만 가끔 골라 읽는 수준이 되었다. 본격적으로 책을 다시 읽기 시작한 건 마흔 살, 직장을 그만둔 후였다. 여러 책을 찾아 읽다 보니 좋아하는 소설가와 시인의 수가 늘어갔다. 그건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그리고 또다시 가슴 속 ‘떠오르는 말들’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것들을 제대로 적어보고 싶어졌다. 이번에는 수필이었다. 충동적으로 수필창작반에 등록했고, 1년 후에 등단을 했다.
등단 후 10년이 지났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나는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다. 슬럼프라고 하기엔 지난 몇 년 동안 늘 슬럼프였기에 그 단어를 거듭 쓰기가 민망하다. 수필을 쓰는 사람으로서 정체성을 못 찾고 우왕좌왕하는 기분이랄까? 산만하고 가벼운 내 영혼은 문학이라는 거대한 바다의 심연을 똑바로 바라보기를 거부하고 계속 표면의 잔물결만 만지고 있는 느낌? 혼란스러운 상황 묘사는 이 글(다시 말하지만, 과제로 적는 글)을 더욱 산만하게 하므로 이 정도로만 하고, 이제 진짜 내가 왜 소설반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지 밝혀야겠다.
‘거짓말이 하고 싶어서였다.’
자꾸, 수필에서 거짓말이 하고 싶어졌다. 수필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계속 거짓말을 해왔다. 대놓고 거짓 이야기도 써봤고, 모호한 판타지 같은 이야기도 썼다. 내 목을 간질거리게 하는 말들은 대체로 그런 것들이었다. 수필가로서 정체성이 계속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서 거짓말을 향한 욕구는 점점 더 거세게 밀려들었다. 그런 순간에 소설반 개강 소식을 들었고, 또 충동적으로 덜컥 등록을 했다.
내가 가진 한없이 가벼운 집중력의 사이즈를 잘 알기에 엉덩이 힘이 중요한 소설 쓰기는 불가능한 성지다. 나는 그냥 거짓말을 잘하고 싶은 거다. 짧은 글에서도 멋진 거짓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비루한 의도로 여기에 앉아 있는 거다. 가르치는 작가님과 수강생들의 소설을 향한 깊은 열정. 그 열정의 숭고함 때문에 수시로 위축된다. 내가 순도를 낮추는 불순물의 역할을 하는 건 아닐까, 자책해보지만 이제 어쩌겠는가. 발을 뺄 수도 없는 노릇. 그래서 변명처럼 이 말을 하고 싶다.
‘나는 소설을 추앙한다.’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의 대사에서 빌려온 말이다. 처음 책을 읽기 시작한 때부터 지금까지 쭉 나는 소설을 추앙해왔다. 나의 추앙에는 문학적 깊이가 부족할지 모르지만, 마음은 늘 진심이었다. 추앙의 마음은 순도 100%. 이 마음 하나로 일단 버텨보련다.
『동리목월』 2023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