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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나셨어요?    
글쓴이 : 김아라    12-05-18 22:45    조회 : 3,457
 
화나셨어요?
 
“서강대교에서 옥수역까지 홧김에 걸었어. 그런데도 화가 안 풀려. 어젯밤 일이야.”
친구가 보낸 문자가 핸드폰 창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무얼까? 옆집 남편이 승진했나? 승진의 기쁨을 누리는 순간은 질투를 뒤에 감추고 축하메시지를 날리는 무리들에게 한턱내는 동안뿐이다. 머지않아 더 높은 곳으로 질주하거나 내리막길로 내몰리며 작열하는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시절이 닥쳐온다는 걸 뒷집 건너 옆집과 그 건너 앞집 남편들이 확실하게 증명하고 있다. 시샘에서 비롯된 화라면 서강대교 북단의 산책로에서 마포대교까지만 걸었어도 되었을 것이다.
 
직장에서 젊은이들이 나이 많은 부장 앞에서 ‘이건 뭥미?’라고 읊조렸나? 그럴 땐 ‘헐~!’이라고 크게 화답하는 수밖에 없다면서 연습까지 해본 것이 석 달 전이다. 타이밍을 놓쳐 제때에 반격하지 못해 받은 짜증이라 해도 한밤중에 한강, 원효, 동작, 반포, 한남대교를 거쳐 동호대교 북단의 산책로에서 서성거릴 것까지 있었겠는가. 거기에다 아직도 화가 안 풀렸다면 친구는 지금 누구에게 몇 km의 화를 내고 있는 것인가?
 
먼 옛날, 에스키모인들은 걷잡을 수 없이 화가 나면 막대기를 들고 집을 나섰다. 설원 위를 걷고 또 걷다가 분노가 가라앉을 때, 그 지점에 막대기를 꽂고 돌아왔다. 시간이 지나 그 길을 또다시 걷게 되면, 그리하여 자신의 표지를 발견하게 되면, 분노의 수위가 여전히 높다는 것을 깨달으며 마음의 평화가 깃들 때까지 스스로를 다독였다.
 
화가 나면 나는 강으로 간다. 마음 속 깃발을 들고 불공평한 세상을 불러 모아 왜 하필 나인지 종주먹을 들이대며 강물을 따라 걷는다. 한강나들목 입구까지는 아파트 후문에서 50m가 채 안 된다. 나들목 입구에 이르면 현관문을 꽝, 닫았던 걸 벌써 후회하고 있을 때가 여러 번 있었다. 성수대교 북단의 다리기둥에서 U턴한다. 1994년, 다리가 느닷없이 끊어져 32명이 이유도 모른 채 강물 속에서 죽어갔던 곳이다. 그 때문일까, 다리기둥을 도는 순간 서로 따지고 화내는 일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곤 했다. 그곳엔 2km짜리 나의 분노가 몇 차례 꽂혔었다.
 
집단의 권력을 가진 자를 향하여 빠르게 유영하는 사람을 보았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남을 돌아보는 일쯤은 고민 없이 생략해버리곤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을 따뜻한 사람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와 언쟁 중에 귀 없이 살고 싶을 만큼 모욕적인 말을 들었다. 내 혀끝에 날이 섰다. 까무러치거나 게거품을 뿜어내게 될 결말이 두려웠다. 차마 시작한 말의 끝을 맺을 수가 없었다. 입은 다물었으나 생각은 닫히지를 않았다. 사칙연산에 능한 내 계산으로 그의 사십구재까지 헤아리며 그날마저도 그를 미워하게 되리라는 사악이 심장을 꾹꾹 찔렀다.
 
사방에서 그가 날름거렸다. 말실수한 것이니 이해해주라는 가증스런 아량의 소유자들이 지닌 주특기, 고차원적 염장지르기에도 걸려들어 그들까지도 증오의 대상 2순위에 등록하며 가슴을 짓찧었다. 개나리 꽃망울이 남김없이 터져 온종일 깔깔거리던 날은 그를 위한 변명으로 산책길을 도배도 해보았다. 세상에 가여운 게 나뿐만이 아니라 그도 마찬가지란 걸 깨닫게 되었지만 분노는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괴로웠다. 어떤 윤리도 믿음도 용서도 소용에 닿지 않았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판단하고 계산하고 두려워하고 아파하고 짜증내고 안타까워하고 놀라고 설레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자기 자신을 그대로, 있는 그대로 바라보십시오. 뭐든 사로잡히는 것이 문제이지 흐르는 것은 건강한 것입니다. “바라봄”이 제대로 되어야 시기와 질투, 불안과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정서까지 제대로 돌볼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바라봄”이야말로 최상의 기도입니다.
-《한국산문》2010년 3월호, ‘이주향의 철학여행’ 중에서-
 
 
아파트 옆 동산의 풀숲이 우부룩 부풀어 오르던 날도 나는 강가를 거닐었다. 바람이 달짝지근했다. 중랑천 하류에서 한강 합류지점까지 나들이 나온 흰뺨검둥오리들이 물풀 사이를 드나든다. 살찐 까치 떼들은 강기슭에서 날아오르는 시늉만하며 소란을 떤다. 마실 나오던 산비둘기가 깜짝 놀라 얼떨결에 산으로 되돌아가버리고, 모래톱에 발을 묻고 있던 진중한 왜가리의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른 듯 까치들을 피해 얕은 개천 쪽으로 겅중겅중 옮겨간다. 그러거나 말거나 먼 바다에서 날아온 갈매기 열댓 마리는 날개를 쫙 편 채 그들 위에서 바람을 즐기고 있었다. 지루해졌는지 한 마리가 세찬 날갯짓으로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그 순간이었다. 불현듯 내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져 있다는 걸 느꼈다. 몇 끼를 죽만 먹은 것처럼 속은 편안했고 목에 걸려 끈적거리던 진액이 사라졌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리고 나에게서 그가 나가버렸다는 걸 알게 되었다.
 
친구는 강을 거슬러 올라오고 나는 강을 따라 내려갔다. 동작대교 북단에 이르자 산책로 저쪽의 핑크색 운동복이 눈에 들어온다. 약간 지쳐있던 내 다리와 팔이 분주스러워진다. 옥수역까지 걸었던 날, 집에 돌아갈 기운이 없어서 택시를 탔다는 친구와 강가에 앉았다. 그러고는 가까운 이가 내뱉은 말 한마디에 상처받은 친구의 분노를 함께 바라보았다.
 
화가 나는 날은 깃발인 듯 꽂힌 마음 속 가시들을 천천히 헤아려본다. 인젠 그것을 억지로 뽑아내려고 하지 않는다. 가시가 박혔구나, 하고 내게 말을 건다. 분노란 상대에게서 나의 부끄러운 본성과 흡사한 것들을 발견하는 순간 생겨나는 소용돌이란 걸 덧붙인다.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간다는, 세월이 약이라는 유행가 가사가 떠오르는 것도 막지 않는다.
 
아마도 나를 화나게 한 그가 누구이며 도대체 무슨 일이었는지 궁금할 것이다. 그러나 알아낸다고 세금 깎아줄 것도 아닌데 그냥 못들은 척 해주길 바란다. 그래도 궁금해 죽을 것 같거든, 염려하지 마시라. 화병으로 죽은 이는 있으나 궁금해서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2011년 월간<<한국산문>>3월호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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