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륜을 거부하는 심리
몇 년 전에 이런 전화를 받았다.
“홍정현 선생님? 저 000입니다. 제가 실수로 선생님 번호를 눌렀네요. 잘 지내시죠? 학교 그만두시고 뭐 하세요?”
그는 나보다 한참 연상의 유부남으로 전에 같은 학교에서 근무했었다. 기억 속을 헤집어보니 회식 2차에서 적당히 취해 부인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거 같기도 하고…, 휴일에 영화를 보자며 내게 전화를 했…, 했었구나. 맞아, 그랬었다. 그리고 졸업한 제자가 한 말도 떠올랐다. 그가 여학생들에게 미묘한 신체 접촉을 잘하기로 유명했다고. 고약한 냄새처럼 밀려든 기억에 불쾌해져 나는 대충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전화를 끊었고, 곧바로 그 번호를 차단했다.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조카 현이 때문이다. 급하게 받을 물건이 있어 동생 집에 들렀다가 열여덟 살 현이가 《불륜의 심리학》이란 책을 읽는 걸 봤다. 아직 연애 경험도 없는 아이가 왜 저런 책을 읽고 있는지 궁금했다. 웹툰과 소설에 관심이 많고 웹소설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일단은 현이의 글쓰기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불륜을 알아야 흥미로운 웹소설도 쓸 수 있지. 열심히 읽어봐.”
빨리 나와야 해서 요렇게 한마디만 던지고 나왔다.
그때부터 불륜이란 단어가 내 소매 끝을 잡고 늘어지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하고는 있으나 하고 있지 않은 척 숨기고 있는 그것. 직장을 다니면서 수시로 떠돌던 불륜의 소문과 우연히 목격한 바람의 현장들, 내게 ‘플러팅’을 던졌던 유부남들. 하지만 나는 불륜의 심리 따위는 모른다. 해본 적이 없기에. 대충 추측은 할 수 있지만 내 입으로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위에서 말한 전화 사건처럼 나는 이성과의 관계에 예민할 정도로 선을 긋는 편이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외도는 어느 날 갑자기 스르륵 시작될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불씨가 될 만한 것은 철저하게 밟아 껐다. 크기가 미미하여 무시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거나 나의 오해일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무조건. 그러니까 바람을 피우는 심리는 잘 모르지만, 바람을 거부하는 심리에 관해서는 할 말이 많다.
나는 겁이 많고 소심한 성격이라 비도덕적 일탈을 두려워한다. 고로 불륜은 내 일상 사전에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마음을 사로잡을 남자가 나타난다면 흔들리지 않을까? 경험에 비추어 그런 일은 거의 없다고 본다. 나를 설레게 할 남자가 나타날 가능성은 확률적으로 희박하다.
우선 외모로 말하자면 배우 정우성, 공유, 이재욱 정도는 되어야 나의 기준으로 미남에 속한다. 오랜 시간 K-드라마의 진정한 팬으로 살아오며 얻은 일종의 부작용이다. 잘생김의 기준이 계속 상향 중이다. 웬만해선 현실에서 그렇게 잘생긴 남자는 만나기 어렵다. 혹시라도 그런 자가 내 일상 공간에 출몰한다 해도, 과연 그가 내게 다가와 좋아한다고 말을 할까? 그건 드라마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 않을까?
물론 호감은 외모에서만 오는 게 아니다. 나는 외모보다는 다른 부분에서 이성에게 매력을 느끼는 편인데, 이 역시 까다로워 쉽게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 머리가 나보다 좋아야 하고, 영어를 유창하게 해야 하며, 수학과 과학을 좋아하는 이과 출신으로, 건전한 가치관에 내게 부족한 성실함을 겸비해야 하는 등…. 이러한 과한 조건 때문에 내 마음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최근 재테크 관련 인터넷 카페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40대 결혼한 친구가 이성 때문에 두근거리는 감정이 그립다며, 다시 느껴보고 싶다고 여자를 사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어쩌지요?’ 읽는 순간 본인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으며, 40대 중후반에 친구들이 사춘기 애들처럼 이상해졌다는 남편의 말이 떠올랐다. 중년의 허무함을 달랠 ‘자아 찾기’의 나쁜 버전이 외도인 건가?
사랑이 시작되려고 간질간질 심장을 건드리는 감정은 세상을 바꿔놓는다. 도처에 사랑이 흘러넘치고 도파민으로 기분은 살랑살랑 날아다닌다. 나도 해봐서 잘 안다. 물론 그 유통기간이 짧다는 것도 안다. 짧아서 더 간절한 걸까? 설렘은 중독성이 있는 것 같다. 하이에나처럼 집요하게 그것을 찾아 헤매는 불륜 중독자를 옆에서 본 적도 있다.
그런데 지금의 난 그런 감정에 관심이 가지 않는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연애세포’가 죽은 것 같다. 여기에는 ‘그놈이 그놈이다’라는 자각이 바탕에 깔려있다. 남편은 나의 셀 수 없이 많은 미팅, 소개팅 행렬의 마침표였다. 나는 양적, 질적으로 풍부한 ‘썸’을 타 봤고 그 경험의 산물로 ‘그놈이 그놈이다’라는 문장을 얻게 되었다. 다른 사람과 만나면 더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기대는 불필요하고 비효율적인 생각으로 여긴다. 도파민이 주는 단기간의 즐거움 때문에 위험을 감수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기 싫다. 그러니 나의 연애세포, 적절히 잘 죽었다고 생각한다. 20대 때 왕성하게 일했으니 이제 편히 쉬라고 말해주련다. 너의 임무는 끝났다고.
마지막으로 밝힐 게 하나 있다. 내게 바람이 불가능한 현실적인 이유. 나는 외도를 한다 해도 가족에게 들킬 게 뻔하다. 불륜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철두철미하게 꼼꼼해야 하고 기억력이 뛰어나야 하는데, 내게는 모두 부족하다. 나는 늘 까먹고 실수하고 위기 상황에서는 바보가 되어버린다.
‘자기 덕분에 차 문제가 잘 해결되었어. 고마워. 사랑해.’
이건 내가 몇 년 전, 카센터 기사님에게 보낸 휴대전화 문자 내용이다. 보내고 반나절이 지난 뒤에야 남편에게 보내려 한 것을 잘못 보냈다는 사실을 알았다. 기사님은 답장을 보내지 않고 있었다. 부랴부랴 죄송하다고 실수였다고 문자를 보냈다. 역시 답장은 없었다. 이런 종류의 실수담은 나의 에피소드 창고에 널려있다. 나에게는 바람을 피우기 위한 기본 기능들이 떨어진다. 그러니 불륜을 거부하는 심리에 ‘불륜 능력 없음’이 더해져서 나의 바람 가능성은 ‘0’으로 수렴할 수밖에 없다.
나중에 현이에게 《불륜의 심리학》에 관해 이것저것 물어봤다. 현이는 평소 불륜 관련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소설, 웹툰, 뮤지컬 등을 좋아해 관심이 생겨 읽는다고 했다. 자신은 감정적 갈등을 다채롭게 보여주는 서사를 좋아하는데 외도는 변심이 기본 전제라 흥미롭다고. 읽기 전에는 본인의 내재적 결핍 때문에 다른 이성에게 눈을 돌린다고 생각했는데, 책 속 사례들을 보니 배우자에 대한 불만 때문에 바람을 피우는 경우가 많더라고 대답했다.
배우자에 대한 불만이라…. 내 불륜을 사전 차단하는 심리의 끝에는 남편이 있다는 건가? 할 말이 많으나 말을 아끼겠다. 마지막으로 내가 좀 의리가 있는 여자라는 말만 툭, 던져본다.
《에세이문학》 2024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