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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레바퀴 꼬마도둑(한국산문2023.10)    
글쓴이 : 김주선    24-08-18 18:11    조회 : 3,512

10월 특집<나의 애장서>

수레바퀴 꼬마 도둑 / 김주선


 엄마의 지갑에서 동전 한 닢 손댄 적 없던 내가 이종사촌 오빠의 책장에 손을 댄 적이 있었다. 중학생일 무렵 여름방학 때 원주에 사는 이모네 집에 놀러 갔다가 맘껏 책을 읽을 수 있는 오빠가 부러웠다. 소아마비를 앓고 있어 책 읽는 일로 소일하던 오빠였다. 아마도 내가 앙큼한 책 도둑인 걸 알았을 것이다. 돌려줘야지 생각은 했지만, 물놀이 사고를 당해 이모의 가슴에 묻히는 바람에 책은 본의 아니게 유품이 되었다.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서를 볼 적마다 술에 취한 채 강가를 걷다가 물에 빠져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한스와 겨우 스무 살이었던 오빠가 겹쳐 보였다.

해거름 전에 둑방 길을 걷던 오빠의 그림자가 그렇게 심하게 절룩거리는 줄도 모르고 나는 그림자를 흉내 내며 걸었다. 책에 파묻혀 행복하게 죽을 줄 알았던 그에게도 청춘의 고뇌가 있었음을 수많은 밑줄과 적바림을 보면서 알게 되었다.

 

 본격 수필을 하기 전 일이다. 표지가 딱딱하고 두꺼운 책은 소품 같았는지, 병뚜껑을 따지 않은 양주처럼 장식장 안에 고이고이 모셔두었다. 견고하고 고급스러워 보인다는 장점은 있지만, 두께 때문에 손을 안 타는 단점이 있다. 소중히 여겨 간직한다고 모두 애장서는 아닐 텐데 전시용 진열 목적이 컸던 모양이다.

등단하기 전에는 요리, 과학, 문학전집을 주로 샀다. 하나같이 갈피끈이 달린 고급 양장본이었다. 끝까지 읽진 않았지만, 내게는 허영과 사치였던 벽돌 책도 여러 권 있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표현이 ‘Don't judge a book by its cover’인 걸 보면 책 표지는 사람의 얼굴과 같은 의미인가 보다. 욕심내어 사둔 책들이 실속 없이 외향에 치중되다 보니 읽은 책보다 안 읽은 책들이 많았다.

나의 서재를 보여주는 일만큼 부끄러운 것도 없다. 책장을 과감하게 정리하고 시나 수필 중심으로 채우기 시작한 건 2020년 등단 후였다. 책의 겉치레보다는 내용이 중요하기에 함부로 다루어선 안 될 몇몇 책은 따로 모아 두었다. 버리는 책은 분리 배출장으로 보내기 전에 아파트 출입문 앞에 하루 정도 두었다. ‘필요하신 분 가져가세요란 문구를 적어놓고 주민의 양해를 구했다. 나 역시 중고 서점이나 아파트 벼룩시장이나 재활용장에서 의외의 책을 득템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가을, 날씨가 선선해지자 옷장 정리 좀 하자고 남편이 채근했다. 옷 한 보따리를 의류 수거함에 넣고 돌아서는데 폐지배출장에 버려진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책 싸개가 벗겨져 알몸만 있는 민무늬 양장본을 집어 들었다. 손광성의 하늘 잠자리란 수필집이었다. 때가 묻은 하늘색 표지에 잠자리 한 마리가 조그맣게 그려져 있었다. 이미 발표한 책 달팽이라는 표제를 하늘 잠자리로 바꾸어 다시 꾸몄단다. 가볍게 날고 싶은 심정 때문이었다고 한다. 한창 이미지의 형상화에 관한 공부를 할 때라 냉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관찰력이 뛰어난 동양화가이자 수필가였다. 수필이 신변잡기에서 벗어나 예술작품이 되려면 형상화에 중점을 둔다는 작가의 말이 더욱 끌렸다.

최민자의 손바닥 수필은 중고 서점에서 발견했다. 돈과 품을 들인 앙증맞은 양장본이 나의 주머니를 털기에 충분했고, 소장 가치가 있어 보였다. 무엇보다 책머리에 쓰인 작가의 말이었다. 손바닥 크기를 넘지 못하는 짧은 글들을 주로 엮었다고 했다. 작가에게 있어 글쓰기란 일상의 틈새를 비집고 호시탐탐 가격해 들어오는 정체불명의 허무에 대한 전면전이라고 말해 왠지 나의 쓸쓸함에 이유를 찾아 줄 것만 같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서정적인 문장이나 시적 산문이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책이라고 했다. 글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것이 어휘력을 키우는데 이만한 책도 없다며 선배 시인이 말해주었다. 의외의 장소에서 발견한 이런 책들이 나의 수필 교본이자 시 교본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에 비하면 목성균의 유고집 누비처네는 두껍지만, 수필 맛이 났다. 서점에서 제값 주고 산 책으로 양장본에 버금가는 두께였다. 위에 언급한 서울대 출신 두 작가의 양장본 사이에 전혀 기죽지 않고 꽂혀 있는 수필집이다. 서사가 있는 산문 문장이 나는 참 좋았다. 혹자는 소설적 기교가 있다고 깎아내리기도 했지만, 나의 산문에 촌사람인 목성균의 영향이 제일 컸다. 그의 글은 나의 유년을 떠올리게 하고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고향의 향수를 젖게 하였다. 못 배운 열등감을 대신해 책장을 장식할 때 그의 수필은 나를 나무라는 듯했다. 퇴직 후 57세 늦깎이로 등단한 그는 대학 졸업도 못 했다. 살아서는 외면받던 수필가였고 글도 몇 년 못 쓰고 일찍 타계했다. 나 역시 늦은 나이에 등단해 만학도로 졸업했기에 그의 책을 대할 때 자세부터가 달랐다.

가끔 시집이나 수필집을 낸 작가 중에는 장수와 무관하게 양장본으로 제작하는 것을 보았다. 옷이 날개라더니 책에 멋싸개를 입히고 띠지까지 두른 고급스러운 책을 증정해 준 작가도 있었다. “책의 표지가 멋지다고 해서 반드시 그 책의 내용도 좋으리라 판단하지 말라는 말이 있듯이, 인생도 마찬가지이리라. 나의 책장에 꽂힌 책처럼 나의 자녀에게 소장 가치가 있는 부모의 삶이고 싶다. 또 누군가에게는 밑줄을 그어 가며 복기할 만큼 내가 좋은 수필 한 권 엮을 형편이면 좋겠다.

 

 수레바퀴를 훔친 꼬마가 늦은 나이에 작가가 될 줄 엄마는 아셨을까. 수레바퀴 밑에서라는 책 이름을 잘 몰라서 엄마는 늘 수레바퀴라고 말했다. 나의 청소년기에 이종사촌의 방에서 헤르만 헤세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는 문학소녀로 자라지 못했을 것이다. 최민자의 말처럼 문학의 사회적 사명 같은 것을 따로 염두에 두지 않는 글쓰기를 한다고 했듯이 나 역시 글 쓰는 일에 사명감은 없었다. 나의 글에 자전적 수필이 많은 이유일지도 모른다. 늘 농담처럼 내가 자서전을 쓴다면 대하소설일 거라고 내 삶을 산전수전에 비유했다. 반백 년을 살고 십 년을 더 살았는데 겨우 고까짓 거 살아보고 파란만장 빨간만장(?)을 운운한다면 돌아가신 엄마가 웃을 일이겠다.

책 모서리를 강아지 귀처럼 접어두는 버릇이 있었다. 빌린 책에는 예의가 아닌 일이지만, 소중하게 아끼는 책일수록 밑줄을 긋고 형광펜을 칠하고 포스트잇을 붙여놓기도 한다. 책 나눔을 하지 않고 소장하는 책에는 다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무가의 기도문이었던 명당경은 집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던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고, 강철수 만화 발바리의 추억은 췌장암으로 떠난 막내 오빠의 청춘을 보는 것 같다. 아쉽게도 기억을 열람해야 만나는 책으로 내 마음에 소장된 것들이다. 책갈피마다 누군가의 체취를 느끼고 추억을 공유하는 책도 있고 삶의 고비마다 아픔을 위로받던 책도 있다. 나는 수필을 쓰는 사람이니 당연히 수필집에 애정이 가겠지만, 뭐니 뭐니해도 나의 최고의 애장서는 몰래몰래 탐했던 이종사촌의 유품이 아닐까.

 

한국산문 20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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