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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명이 지나는 시간 (에세이스트 2024 7-8호)    
글쓴이 : 김주선    24-08-18 18:23    조회 : 5,384

박명이 지나는 시간 / 김주선

 

 푸른 기운이 열린 방문 앞에서 나를 깨웠다. 엄마는 벌써 일터로 나갔는지 집은 조용했고 삶은 감자가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잠이 덜 깬 몽롱한 상태로 고양이 세수만 하고 서둘러 가방을 메고 등굣길에 올랐다. 족히 오리는 넘는 길이다. 학교 가는 아이들이 안 보이길래 지각인가 싶어 나는 지름길인 둔덕길에 올라섰다. 쑥부쟁이가 유혹했지만, 시선을 두지 않았다. 그때 저 멀리 쇠꼴을 지고 건너오던 누군가가 나를 불러 세웠다. “거기 누구냐?. 다 저녁에 어딜 그리 급히 가느냐?”. 아버지 목소리였다. 순간,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낮잠 자는 동안 마법이라도 걸린 걸까. 해넘이를 해돋이로 착각할 정도니, 이십여 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경험한 그 착란의 순간을 나는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1학년생이 느끼기에 머리끝이 쭈뼛 설 정도였다. 하늘은 완전히 어둡지도 밝지도 않으면서 푸르스름한 빛을 띠어 매우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아버지를 따라 돌아오는데 금세 날이 저물고 개밥바라기가 떴다. 참 신기했다. 동이 트는 줄 알았다니, 아버지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엄마는 더위를 먹어 헛것이 보여 그렇다며 저녁 밥상에 한약재를 넣은 닭백숙을 끓여냈다.

그날의 일은 한여름 밤의 꿈처럼 유야무야로 끝나고 여고생이 되었다. 1학년 담임은 불어를 가르쳤다. 영어와 달리 어찌나 발음이 동글동글 굴러가는지 입안에 구슬을 문 기분이었다. 학력고사 외국어영역에 불어를 선택할 만큼 참 매력적인 언어였다. 아베쎄데(abcd)를 외우고 Merci beaucoup (메르시 보끄, 아주 고맙다)며르치 볶음이라고 말도 안 되는 유머를 할 때였다. 여름방학 때 파리를 다녀온 담임이 프랑스의 푸른 시간에 대해 말해주었을 때 나는 비로소 내 어린 날에 경험했던 착각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저 멀리 보이는 짐승이 양몰이를 하는 개인지 양을 물어갈 늑대인지 잘 분간이 가지 않는 미묘한 시간대를 말한단다. 저물녘 황혼과 새벽의 여명을 마법의 시간이라고 할 만큼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보이는 때란다. 가로등이 켜지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교통사고가 제일 많은 시간이기도 하다. 어슴푸레 동이 트면 샛별이 뜨고, 땅거미 질 무렵에는 서쪽 하늘에 개밥바라기가 뜬다. 같은 별이지만, 양치기에 있어 별의 의미는 다르다고 한다.

고대 로마부터 쓰였다는 관용어를 그대로 옮겨 프랑스 사람은 개와 늑대의 시간’(l'heure entre chien et loup)이라 불렀다니 얼마나 아름답고 시적인가. 언젠가 나도 그곳에 가게 된다면 몽마르트르 언덕에 앉아 하늘을 보리라고 다짐했다. 그래야 내가 꿈을 꾼 게 아니라는 설명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본어인 타소가레(황혼黄昏)의 어원도 거기 뉘시오?”라는 옛말에서 유래되어 굳어진 뜻이라니 좀 이해가 되었다. 사람과 귀신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시점, 이처럼 박명이란 상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 식별이 어려운 시간대임에는 틀림없는 듯싶다.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이런 박명의 시간을 경험했으리라. 시계를 보지 않고는 이게 해가 뜨는 건지, 지는 건지 판단할 수 없는 모호한 순간이 있다. 나를 해코지할 존재인지 보호할 존재인지 모르는 불안정한 상태를 옛사람들은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 하지 않았을까. 빛과 어둠의 경계가 불분명하여 사물의 분간이 어렵고 어떤 판단도 감성적이고 몽롱해질 수밖에 없다. 마치 꿈과 현실의 시공간적 경계가 허물어진 것처럼 막연한 두려움이 느껴질지도 모른다.

뭘 해도 안 되는 시절, 미래가 보이질 않던 시절이 있었다. 어떤 결정을 해야 할지 몰라 두려움에 떨기도 했다. 병명도 없이 시름시름 앓거나, 하는 일 족족 엎어져 앞이 보이지 않는 시간이었다. 학업, 취업, 결혼, 육아, 주택문제 등등. 무엇 하나 순탄한 것은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어둠이 더 짙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앞날이 두려웠지만, 살다 보니 꼭 그런 암울한 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해가 뜨면 희망이 차오른다고 하지 않던가. 새벽이 오기 전의 어둠이 제아무리 짙다고 해도 박명은 옅어지기 마련이고 기다림 끝에 결국 찬란한 햇빛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았다. 나를 해치러 온 짐승의 하울링 따위는 겁나지 않았다. 지지하는 가족에 대한 신뢰가 있기에 불시에 공격당할 수 있는 늑대에 대한 두려움은 극복되었다.

이번 여름은 유난히 길고 더웠다. 노을이 진 초저녁에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면 나는 가끔 하늘을 올려다본다. 다행인 것은 팬데믹 이후로 하늘이 좀 맑아져, 어쩌다 운이 좋으면 산책길에 푸른 박명의 시간을 마주한다는 것이다. 영화 트와일라잇에 나오는 뱀파이어 종족의 창백한 피부처럼 야위어 가는 낮달은 또 얼마나 신비로운지 모른다. 사방이 어둑어둑해져 나무든 사람이든 모든 형체가 불분명한데 사진을 찍어보면 하늘이 그렇게 파랄 수가 없다. 아니 짙은 청보라색이라고 해야 옳다. 해가 넘어간 각도에 따라 점점 변하는 파란 스펙트럼 하늘 바탕에 초승달이라도 걸린 날은 특별한 자연의 선물이다. 습도가 높은 여름날에 대기를 통과하던 태양 빛이 수증기와 부딪치면서 방출되는 빛의 산란 때문이라니, 어린애가 착각할 만도 하지. 너무나 하늘빛이 영묘해 산책을 멈추고 벌렁거리는 가슴을 다독일 정도였다. 어린 시절의 꼬맹이가 불현듯 떠오르고 아버지가 그리워졌다.

요즘은 인생의 황혼기로 접어들어 그런가, 나이가 들수록 하루 중에 가장 안온하고 평화로운 시간이 등불을 켜는 해거름 같다. 새벽녘에 각자의 터전으로 흩어졌던 식구들이 하나둘 식탁으로 돌아오는 시간, 밥 냄새가 나는 따뜻한 저녁이 그렇게 삶의 위로가 된다. 해가 떨어지면 기르던 개도 돌아와 밥 달라고 하고, 종일 수탉의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던 방목 된 닭들도 식솔을 이끌고 닭장으로 돌아온다. 짙은 고독을 견뎌낼 수 있도록 서로의 마음을 보듬는 시간이란 것을, 한낱 미물도 아는 법인가 보다.

엄마 품을 파고드는 아이처럼 지금, 박명의 시간을 지나는 중이다. 사방이 고요하다.

 

에세이스트 2024 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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