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전 상서
“깅자야 이리 와 봐라” “예 할아부지 불렀습니꺼예” “그래 빨리 공책과 연필 갖고 와서
앉아 보거라.” 할아버지는 글씨도 잘 못 읽는 손녀에게 억지로 글을 쓰게 하였다. 밖에 나가 친구들과 고무줄놀이, 공기놀이를 하고 싶어도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좋으실 때는 한없이 인자하고 착한 분이다. 화를
내기 전에 빨리 써야 한다. 타고난 성격은 절대로 고칠 수 없다는 말도 있지만 그래도 세상에서 할아버지가
최고다. 세상을 떠난 엄마를 대신해 깅자 추자를 키워 주셨던 분이다.
단발머리 깅자는 할아버지가 불러주는 대로 쓰는 편지를 쓸 때가 제일 싫었다. 아버지는 공무원
생활을 하였고, 남겨진 손녀를 할아버지가 맡아 키우고 있었다. 전화도
없는 시절이었다. 유일하게 소식을 전 할 길은 오직 편지였다. 일주일에
한 번 아니면 보름에 한 번은 도회지에 계시는 아버지께 편지를 써야했다.
할아버지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글을 배우고 싶지만 종이와 붓이 없어 읽는 것만 배웠다고 하였다. 단발머리 깅자는 언제나
할아버지가 편지를 쓰라 하면 열심히 썼다. 그래야 아버지가 그 내용을 보고 생활비를 보내주고 집안사정을
알릴 수 있었다. 초등학교 들어가서 겨우 한글을 배웠던 깅자는 머리가 나빠 글을 쓰는 일이 쉽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마루에 걸터앉아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도회지에 나가
있는 당신의 아들에게 무슨 말을 써야 할지 깊은 생각을 하는 순간이었다. 할아버지는 머리가 짧은 편이고, 이마에는 굵은 세 개의 주름살과, 눈이 작았다. 입주변에 주름이 생겼다. 양 볼은 살이 없어 꺼져 있는 편이고, 옷은 무명 바지저고리 차림이었다.
“자아 인제 내가 불러 주는
대로 받아 적꺼라. 아버님 전 상서 하고 썼나? “예”아버님 그동안 기체후일향만강 하옵시고 날씨도 쌀쌀한데 잘 지내고 계십니꺼 집걱정은 하지 말고 할아버지, 동생, 저 하고 잘 지내고 있으니 안심하십쇼. 지난달에는 편지가 늦어져서 걱정이 됐다. 이번에는 미리 날짜를 땡겨
편지를 깅자가 받아 적고 있다. 잘못된 글짜가 있어도 네가 잘 알아서 읽어 주길 바란다. 교직에 있을 때 제자들을 훌륭한 사람이 되게 잘 가르쳐라. 깅자는
연필에 침을 발라 내가 불러 주는 대로 열심히 잘 적고 있다. 쓰기 공부는 그런대로 하고 있는데 산수
공부는 못해서 벌을 받고 늦게 오는 날도 있다만 차차로 나아지겠지. 그러고 보니 깅자 추자 옷이 낡아서
이번에는 예쁜 옷을 사주어야 될 것 같다. 문 선생 딸들이 옷이 없어 낡은 치마나 윗도리를 입고 다닌다며
수군거리더라! 할애비가 능력이 없어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어미가
살았으면 예쁜 꽃물을 들여 노랑저고리와 까망색 치마를 입혀서 남에게 그렇게 보이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러니
이번에는 돈을 좀 풍족하게 보내라. “깅자야 할아버지가 불러 주는 대로 잘 적어가고 있졔” “예 할아버지 또 불러 주소예” 그리고 돈을 넉넉하게 보내라. 쌀도 좀 많이 팔아서 손녀들 배부르게 먹게 해다오. 네가 돈을 벌어서
여기 저기 떼어 주다 보면 힘이 들끼다. 재혼한 살림에도 보태야 하고,
우리도 돌봐 주어야 하니 네가 고생이 많구나. 우짜겠노.
이렇게 해서라도 손녀들 배곯지 않게 키워야지. 그리고 전번에 이웃에 사는 영수 아비한테
빌린 돈도 갚아야 한다. 그럼 이만 줄인다. 잘 생각해서
빨리 답장을 주기 바란다. 시골에서 애비가 띄운다. “깅자야
한번 읽어봐라. 할배가 불러주는 대로 잘 전달이 되었는지 들어보자.”
읽고 나니 할아버지는 잘 썼다며 칭찬을 하고 웃었다. 마음이 놓였다. 아버지가 편지를 받아보고 답장을 보내왔다. 다 읽고 난 후에 곧바로
아버지께 답장을 썼다.
아버님 전 상서
“깅자야 또 아버지에게 답장을
보내야 한다.” “할아부지 불러 주쇼.” 네가 편지를 쓸
때 목과 손가락이 불편해 보이더라. 그러니 이제는 마룻바닥에 배를 붙이고 허리와 다리를 쭉 펴고 곧은
자세를 하고, 팔과 손도 네가 편한 대로 하거라. 맨날 니한테
어려운 편지를 쓰게 해서 내 맘이 짠하다. 글쓰기 공부는 일등을 할 끼다. 편지내용을 네가 모르고 다른 아이들처럼 걱정없이 자라야 할 낀데, 어른인
할비가 마음이 아푸다. 자아 인제부터 잘 써거라. 아버지
여기는 날씨도 좋고 온 산과 들에는 참꽃이 한창 피었습니다. 아버지가 계시는 그곳에는 우떠섭니꺼예. 지난번에 보내준 돈으로 합천 장날 깅자 추자 옷도 한 벌씩 샀다. 깅자는
언니라고 단색인 노랑색 블라우스와 잘잘한 꽃 무늬가 있는 치마를 사고, 추자는 아직 어려 또래 친구들이
입고 있는 것을 보고 비슷하게 골랐다. 분홍색 바탕에 레이스가 달린 블라우스를 사고, 치마는 유행한다는 파란색의 꽃 무늬를 사주었다. 사진기가 없어 찍어
보내 줄 수도 없으니 상상으로 생각해라. 단발머리 깅자는 지금 그 옷을 입고 내가 불러주는 답장을 빠트리지
않고 열심히 쓰고 있다. 새 옷을 입고 글을 써서 그런지 생긋생긋 웃으며 얼굴이 예쁘다. 네가 깅자 추자 얼굴도 자주 보고 해야 하는데 사정이 그러니 할 수가 없구나.
타향에서 살면 어려움도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짜겠노 우리 가족들이 이렇게 살아 간다는
것도 큰 복이다. 엄마가 없어도 할배 말 잘 듣고, 시키는
대로 잘하니까 나도 마음이 놓인다. 아직은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지만 먼 훗날 엄마 없이 자라서 슬픔도
많을 줄 안다마는 그래도 손녀들이 너의 자식으로 손색없이 잘 자라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전번에 보내준
돈이 모자라 영수 아비에게 빌린 돈은 갚지 못했구나. 이 편지를 받아보면 어떻게 하든지 돈을 즉시 보내라. 영수 아비를 볼 때마다 내가 미안하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운제
한번 다녀가거라. 편지로 말을 다 하려면 일년 열두 달을 써야 하니 이만 줄인다. 시골에서 아비가 띄운다. 건강하게 잘 지내라
아버님 전 상서
깅자가
쓴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무사하게 잘 지낸다고 하니 다행입니다. 어린
손녀둘을 키우는 아버지께 불효만 해서 죄송합니다. 아버지께서 돌봐주시지 않으면 그 아이들이 그렇게 착한
아이로 자라지 못했을 것입니다. 없는 살림에 손녀들 뒷바라지가 얼마나 힘드시겠습니까 아들 도리를 다
하지 못하고 이렇게 살아간다는 저도 한심합니다. 아버지께 짐을 지우고 저는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습니다. 깅자 엄마가 있을 때는 집안 걱정이 안됐지만 이제 매일 걱정이 됩니다. 연료하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가슴에 찬 바람이 휑하니 지나갑니다. 그래도 아버지의 심정을 어찌 다 알겠습니까! 아버지 뵈올 때까지 부디 몸 조심하시고 깅자 추자도 할아버지 말씀 잘 듣고 씩씩하게 웃음을 잃지 말고 지내야
한다. 아버지 이만 줄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요. 외지에서 아들 올림. 할아버지는 깅자가 큰 소리로 또박또박 읽어주니 너의 아버지 심정도 이해가 간다는 말에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깅자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아부지는
운제 오심니꺼예. 겨울인데 할아버지 동생이 입을 따듯한 옷도 사가지고 왔으면 좋을 낀데 나도 돈을 벌어야
하겠다는 생각입니더예.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너무 좋은 분이셔요. 할아버지가
오래오래 사셔야 맛있는 거 많이 사줄 낀데. 할아버지 웃으시면 오래 산다는 것 맞아예. 추자는 아직 어리니 잘 몰라 다행입더예. 할아버지가 만들어준 밥이며
반찬은 세상에서 오직 하나뿐인 음식이고 최고입니다. 할아버지 아무 불평없이 잘 키워 주어 그저 고맙고
감사한 마음입니다.
하늘나라에 계신 할아버지께 보고 싶은 마음을 전합니다. 눈이
내리면 아랫목에 앉아 외지에 나가 있는 외동아들 아버지 걱정을 하시며, 엄마 없이 자라는 손녀를 보고
눈물은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얼마나 아픔이 있었겠습니까! 따듯하고 고마운 할아버지! 세상에서 누구를 존경하느냐 하고 물어 보면 당연 할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그림자라고 하셨지요. 오늘은 유난히 할아버지 생각이 꼬리를 물고 놓지를 않습니다. 햇살이 고운 마루에서 할아버지가 아버지께 보내는 편지를 적어 보고 싶습니다.
글을 쓰고 있는 순간 이런 날에는 그립고 보고 싶은 분들에게 사연을 적어 보내고 답장을 받고 싶은 날입니다. 할아버지께서 사랑해 주시던 아버지와 이 서방도, 엄마같이 돌봐 준
친정 고모, 고모부가 모두 곁을 떠났습니다. 할아버지 장례식
때 상여를 메고 울며 뒤 따라가던 사람들이 눈에 선합니다. 더 슬프고 온갖 생각들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듭니다. 할아버지 불러도 대답은 없지만 편안한 위안이 됩니다. 지금은
손편지를 쓸 일도 없습니다. 손전화기가 있어 부모 형제 친구들에게 안부를 묻고 간략하게 전하는 좋은
세상입니다. 이럴 때 할아버지, 아버지가 살아 계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영상으로 얼굴을 보고 인사도 하고, 좋은 곳에 가서 맛있는 식사를 하며 할아버지 아버지 사랑합니다
하는 마음을 전하고 싶은 초겨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