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리니행 기차
카테리니행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
11월은 내게 영원히 기억 속에 남으리/
내 기억 속에 남으리/
카테리니행 기차는 영원히 내게 남으리 (...)
(조수미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
바람이 스산한 11월의 어느 날, FM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의 선율이 메말랐던 내 감성을 흔들었다. 카라얀이 ‘신이 내려준 목소리’라고 극찬한 조수미의 감미롭고 매혹적인 음성이 가슴에 파고든다. 잔잔한 기타 연주 선율이 빚어내는 애절한 이별의 노래는 나도 저녁 8시가 되면 무작정 어느 기차역으로 달려가야 할 것 같은 충동을 일으킨다. 어떤 비밀을 품었기에 사랑하는 임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일까? 차창 밖, 잎을 떨군 앙상한 나무들이 처량하다. 마치 노래의 주인공이 된 듯 마음이 술렁이고, 자동차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빠진다.
음악을 듣고 눈물을 흘려본 게 얼마 만이던가. 잠시 감수성이 예민해지고, 마음속 깊이 잊혔던 감정이 스며 나온다. 친구라도 불러내 근사한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싶어 간판을 찾으며 잠시 일탈을 꿈꿨다. 그러나 그날따라 가족을 위한 거룩한 의무들이 거리에 떠도는 낙엽처럼 많다는 걸 곧 떠올렸다. 결국 기차역 근처도 못 가고 일상의 소소한 일들을 처리하고 장바구니를 챙겨 집으로 돌아왔다.
식구들이 잠든 늦은 밤, 노래를 다시 들어보려고 컴퓨터를 켰다.
함께 나눈 시간들은/ 밀물처럼 멀어지고/ 이제는 밤이 되어도 당신은 오지 못하리/ 당신은 오지 못하 리/비밀을 품은 당신은 영원히 오지 못하리 (...)
마리아 파란투리와 아그네스 발차가 부른 노래들이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내게 깊은 여운을 남긴 그 노래는 단순한 이별 이야기가 아니었다. 민주화를 위한 투쟁과 저항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숨겨진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 울림은 얕은 감상의 벽을 깨고 역사의 외침으로 다가왔다.
이 노래는 2차 세계 대전 때 독일과 맞서 싸우기 위해 전장으로 떠난 그리스 청년의 아픈 사연을 노래한 곡이다. 나치에 저항했던 그리스의 젊은 레지스탕스 연인과 친구를 위해 실제로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민중의 비극과 슬픔을 싣고 떠나는 기차. 카테리니행 기차는 음악 자체가 깊은 울림을 지녔는데, 애절한 사연까지 더해져 지구촌 곳곳에 널리 퍼진 듯하다.
마리아 파란투리는 테오도라키스와 함께 그리스의 저항 음악을 세계에 알렸다. 그녀의 깊고 풍부한 알토 음성은 테오도라키스의 저항 음악에 생명력을 불어넣었으며 그 메시지는 전 세계를 울렸다. 테오도라키스의 음악은 억압받는 민중의 목소리였고, 저항의 메시지였다. 그의 음악을 통해 세계는 그리스 민주화 투쟁의 현실을 알게 되었고, 이는 예술적 감동을 넘어 정치적 메시지를 주었다.
테오도라키스는 그리스 독재 정권의 박해 아래서도 1천 곡이 넘는 민중 가곡을 작곡한 민주화 운동의 투사였다. 이 노래를 작곡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쿠데타가 일어나 그의 음악은 그리스 전역에서 금지되었다. 테오도라키스 투옥과 망명을 거듭했지만, 음악을 통해 민중의 희망을 노래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의 선율은 억압에 맞선 민중의 희망을 일깨우고, 전 세계 자유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진정한 감동은 결코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낭만적인 상상을 하던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조국을 위한 투쟁의 불꽃을 음악에 담아낸 그 숭고한 열정 앞에서 숙연해진다. 고난의 시간 속에서 음악은 위로를 뛰어넘어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힘이 되었다. 음악을 통해 고통받는 민중의 침묵을 깨우고 공감시키며 군부독재에 항거한 테오도라키스의 불굴의 정신은 ‘진실은 우리를 행동하게 한다’는 그의 실천 정신과 예술 정체성을 실감 나게 한다.
그리스는 한국만큼이나 외세의 침략과 독재로 고통받았던 역사를 간직한 나라다. 유럽 문명의 산실로서 찬란한 유산을 남겼지만, 그 이면에는 자연재해와 전쟁, 그리고 암울한 독재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한때는 유럽을 제패하고 인류 역사상 가장 먼저 민주주의를 꽃피운 문화 대국이었지만, 근대 이후에는 치열한 내전과 쿠데타의 무자비한 폭력 아래 신음해야했다.
그리스 가곡은 4세기 동안 터키 지배를 받았던 시절과 2차 세계대전 중 나치 침략 때 불렀던 저항의 노래가 대부분이다.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 역시 비장하고 애절한 민중의 마음이 은유적으로 표현된 저항의 노래다. 외세의 지배와 언론 탄압과 자유의 억압으로 가사가 구체적이지 못하고 분노와 슬픔을 간접적으로 표출할 수밖에 없었던 비극적인 역사는 이제 한 줄기 바람처럼 영영 사라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늦은 밤, 노래를 반복해 들으며 마셨던 커피 탓인지 잠이 오지 않는다. 창문을 열고 올려다본 밤하늘에는 구름 장막 속으로 별이 진 지 오래다. 내 귓가엔 어둠을 헤치며 달려가는 카테리니행 기차의 먼 기적 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그 소리는 내 마음속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