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acheZone
아이디    
비밀번호 
Home >  문학회 >  회원작품 >> 

* 작가명 : 봉혜선
* 작가소개/경력


* 이메일 : ajbongs60318@hanmail.net
* 홈페이지 :
  유리창 닦기    
글쓴이 : 봉혜선    25-03-07 22:13    조회 : 1,125

유리창 닦기

 

 맑은 날을 골라 유리창을 닦으려 게으름 피우기를 며칠이었다. 1년을 추스르기에 연말연시는 적당하지 않다. 무얼 정리하고 새해맞이 하려 움직이기에는 추운 때이기 때문이다. 설날로 미룬 출발, 우수 혹은 경칩, 혹은 입춘 등 절기로 미룬 시작, 새 학기 시작과 더불어 비로소 시작할 수 있던 학창 시절과 나이 차가 많은 아이 둘의 입학 등 달력이나 물리적으로 강요된 시작은 많다. 나의 봄맞이는 유리창을 닦음으로써 비로소 시작된다. 봄이 멀지 않은 날 유리창 닦기가 연례행사다.

 한겨울 끝자락 할 일인 유리창을 닦아 바깥을 들이는 일은 봄이 멀지 않았으니 희망을 가지려는 수고로움이다. 마음을 정비하고 온 창문을 다 닦아야 오는 듯한 봄을 맞이하는 이 의식은 장 담그기처럼, 한여름 휴가에 치르는 몸살처럼, 가을걷이처럼, 김장처럼 치러야 하는 통과의례이다. 몸을 움직여 마음을 맑히는 작업은 주술과도 닮았다. 쨍쨍 요란한 요령 소리가 나고 사람들이 몰려드는 장소에서 치러지는 묵은 한이 풀리는 굿판처럼 의식(儀式)도 동반되어야 한다.

 봄이 왜 희망일까 갸웃하면서도 겨울도 충분히 희망이 있는 곳, 잉태되는 곳이라고 여긴다. 희망을 품는 것은 수고로움이 전제되지 않으면 망상에 그칠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한껏 스스로 세운 계획을 버리기 일쑤였다. 게으름이라는 핑계로라도 쉼을 뺀다면, 그리고 쉴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절망스러우냐. 잠자리에 들면서 웃는다면 쉼에 대한 만족감일 것이다. 희망을 품는 것보다 절망하지 않거나 포기하지 않는 것이 조금 더 지혜로운 일임을 겨우 깨닫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어느 이층 찻집에서 바라본 삼거리 풍경이 떠오른다. 시선이 조금 높아진 것뿐인데 사방이 보이는 듯한 위치였다. 왕의 자리가 이렇지 않을까 짐작될 정도로 바깥이 품 안에 들어왔다. 비라도 조금 내렸다면 더욱 안온했을까, 옆 사람과 더 가까이 붙어 앉을 수 있었을까. 유리창이 없다면 안정적인 관조의 자세는 나올 수 없었으리라. 아파트 베란다가 유리창 없이 뚫려 있다면 느낄 수 없는 안온함처럼.

 유리 너머 수족관 속과는 다른 넓게 트인 시야에 말을 잃고 창에 조금 가까이 갔던가. 아니면 조금 물러앉았던가. 안경집 창문처럼 맑았던 그 장면이 오래 남아 있는 건 어쩌면 맑은 유리창 때문인지 모른다. 차가움을 느낄 수 없던 안온한 창. 점포마다 투명한 창문에 매달려있던 유리를 닦는 사람들이 그제야 보였다. 매일 닦아야 하는 수고로움은 안을 보이고 싶은 마음일까, 밖을 내다보기 위해서일까.

 창문 세정제를 뿌리고 신문지를 붙이고 젖은 걸레와 마른걸레질을 한다. 유리창을 없애기라도 할 기세로 땀이 뻘뻘 나도록 유리창에 매달린다. 세정제 냄새는 온몸에 들러붙는다. 입김으로 온기를 불어 넣는다. 입김에도 세정제 냄새가 배어 있다. 문을 이리저리 돌려 열었는데 어느새 닫히기도 한다. 꼼짝없이 냄새에 갇힌다. 군데군데 아물지 않은 상처 같은 생각의 편린이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는다.

  점점 더 투명해지는 유리창과 차경으로써의 하늘, 그리고 말갛게 되는 마음. 닦고 닦아 맑은 창에 기어이 나를 비추고야 말겠다는 헛된 결심. 점점 내가 사라지는, 유리창이 사라지는 경험이라도 쌓으리라 다짐해도 묻어나오는 더러움, 그리고 더 남은 창문. 몇 개나 쌓여가는 시커먼 걸레를 보며 나의 더께 두꺼운 때를 만나는 것. 됐다고 생각되는 순간이 없어 포기하며 돌아서다 닫힌 유리창에 부딪혀 실내로 들어갈 수 없게 되는 장면까지. 생은 유리창 닦기 같은 아이러니로 덮인 것이 아닐까. 끊임없이 달라붙는 각종 부딪힘을 닦아내고 맑히려 애쓰지만 끝내 부딪혀 버리는.

 꼭 필요해 챙기기를 잊지 않는 세정제 냄새는 이미 몸에 배어 가시지 않고. 어쩌면 흐린 날이 유리창 닦기 좋은 날일지도 몰리라고 생각하며 더 밝아진 햇빛을 더 흘겨보지도 못하고 돌아 들어오는 작업. 더 따듯해져야 반대편 유리창에 들러붙은 얼룩을 마주 지워줄 줄에 매달린 사람이 올 텐데 하는 기대를 품으며 올해 유리창 닦기는 끝. 더 따듯해질 봄날 기대.


<<수필과 비평>> 2025, 3 


 
   

봉혜선 님의 작품목록입니다.
전체게시물 56
번호 작  품  목  록 작가명 날짜 조회
공지 ★ 글쓰기 버튼이 보이지 않을 때(회원등급 … 사이버문학부 11-26 96444
공지 ★(공지) 발표된 작품만 올리세요. 사이버문학부 08-01 98854
41 잘 아시겠지만 봉혜선 03-06 3404
40 이어도를 이어도 봉혜선 02-14 3375
39 꿈꾸는 양수리 봉혜선 12-07 3071
38 내빌라둘께라 봉혜선 11-27 3627
37 수상한 수상(隨想) 봉혜선 10-31 3414
36 너무 더워요 봉혜선 10-16 3888
35 즐거운 전철 봉혜선 09-10 2826
34 흐르다 봉혜선 08-30 2024
33 공병(工兵) 가고 싶어 봉혜선 08-29 2376
32 엄마의 외출 봉혜선 08-25 2538
31 인사이드 마그리트 봉혜선 08-23 2146
30 나는 춤을 춥니다 봉혜선 08-22 2642
29 붕어빵 봉혜선 07-25 2055
28 질문에서 시작했다 봉혜선 07-15 2826
27 숨 쉬는 갯벌 봉혜선 07-15 2926
 
 1  2  3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