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닐봉투 속 손목시계
조 헌
낭패였다. 내일 아침 출근을 위해서는 20시 발 서울행 열차를 탔어야만 했는데, 그만 예약된 기차를 놓치고 만 것이다.
지난겨울, 나는 친척의 결혼식이 있어 부산엘 갔던 적이 있었다. 오랜 만에 만난 친척들의 환대(歡待)도 뿌리칠 수 없었지만, 취하면 느긋해 지는 나의 술버릇이 문제였다. 결혼식을 마치고 시작된 피로연은 술자리로 이어졌고 몇 번이나 눈짓으로 만류(挽留)하는 아내를 모른 채 한 호기(豪氣)가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고 말았다.
“사정이 딱해서 그러니 어떻게 서울 갈 방법이 없을까요?” 매표창구에 매달려 사정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니 슬며시 걱정이 되며 먹은 술이 확 깨었다. 나의 출근도 문제지만 집에서 기다릴 아이들 걱정에 아내는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애타는 심정에도 불구하고 난처해하는 매표원의 표정을 보니 별 뾰족한 수가 없어보였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 참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이 때였다. 초초해 하는 우리의 모습을 사무실 안에서 바라보던 한 역무원이 나를 유심히 쳐다보며 다가오는 것이었다. “혹시........ 선생님 아니십니까? 기억하실지 모르겠네요. 저 우영인데요. 박우영!” 설혹 생각이 덜 나도 아는 채 해야 할 판에 다행이도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을 했던 제자를 만난 것이다. 마치 지옥에서 지장보살을 만난 듯 놀랍고 반가웠다.
잠시 후, 그는 사복(私服)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염려 마세요. 매 열차마다 다급한 일을 위한 예비표가 있어요. 바로 다음 차로 가실 수도 있지만 제가 선생님을 그냥 이렇게 보내드릴 수가 없어서........ 11시 20분, 주무시면서 올라가실 수 있는 침대칸이에요. 선생님! 그건 그렇고 어서 가시죠.” 나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선택의 여지없이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흥분한 듯 서두는 그를 따라 역 근처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저녁을 잔뜩 먹은지라 여러 차례 마다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 고맙고 반가운 자리가 아닐 수 없었다.
우영이를 처음 만난 것은 십여 년 전에 일이다. 그는 도무지 말이 없고 유난히 왜소했으며 야코가 죽어 언제나 침울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사고로 부모를 동시에 잃고 4살 위 누나와 함께 힘들게 생활하고 있어서 늘 마음이 쓰이던 제자였다.
1학기가 끝나갈 즈음, 등록금이 2기분이나 밀리자 결석이 잦아졌고, 걱정이 된 나는 수소문 끝에 찾아간 적이 있었다. 우영이는 누나가 근무하는 출판사 건물의 층계 밑, 두어 평 되는 사선(斜線)의 공간(흔히 허드레 물건이나 청소도구 등을 보관하는 곳)에 방을 꾸며 살고 있었다. 나를 보자 고개를 숙인 채 여전히 말이 없었고, 동생만큼이나 작은 누나 역시 아무 말도 못한 채 어쩔 바를 모르고 있었다. 유독 키가 작은, 그래서 훨씬 안쓰러워 보이는 남매. 너무나 힘겹게 생활하는 이들을 위해 어떤 도움도 줄 수 없음에 가슴이 미어졌다.
학교로 돌아온 나는 몇몇 주변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반별 모금운동을 벌렸고, 장학금을 받아 주었다. 큰 도움은 못되었다하더라도 등록금 걱정은 덜었고, 생활하는데도 약간의 도움이 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 후, 어렵사리 졸업을 했고, 10년이 훨씬 지나 부산에서 이렇듯 우연히 만난 것이었다. 졸업을 한 후 한 번도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 워낙 말이 없어 특별히 가깝게 지내던 친구도 없었다. 나는 간간이 우영이를 생각하면서 걱정과 함께 서운함도 함께 갖고 있었다. 한번쯤은 소식을 전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하고 야속한 생각도 없지 않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궁금한 것이 많은 나에게 그는 힘겹게 살아온 지난 일들을 앞뒤 없이 말했다. 졸업 후 암담했던 시절, 그리고 그 까마득한 절망을 딛고 성실히 노력해서 된 철도공무원, 재일교포에게 시집가 현재 일본에 살고 있는 누나. 작년에 결혼해서 사흘 전에 첫딸을 나은 아내, 말하는 것이 학교 다닐 때 보다는 훨씬 낳아진 듯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조용히 전했다. 하지만 나와의 시선은 여전히 피한 채 상모서리를 보면서 말이다. 그날 나는 그의 아내와 누나하고도 통화를 했다. 그동안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어 마치 잘 아는 분 같다는 그의 아내와 흐느끼는 듯 감사했었다는 말만을 되풀이하는 그의 누나. 목소리에 진심이 담겨있었다.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기차를 타야할 시간이 촉급했다. 우리는 다시 서둘러 역으로 갔고, 처음 타보는 침대열차에 어리둥절해 하면서 객차에 올랐다. “선생님! 잠깐만....... ” 그는 다시 개찰구 쪽으로 뛰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나는 다 된 출발 시간을 기다리면서 그가 뛰어간 쪽을 초초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다시 나타난 것은 출발 직전이었다. 겨울인데도 땀을 뻘뻘 흘리며 숨이 턱에 찬 그는 검은 비닐봉투 하나를 불쑥 내미는 것이었다. 열어보니 포장도 못한 손목시계 두개가 들어있었다. “시간은 없고 뛰어다녀봤자 마땅한 것이 없어 역 앞 노점에서 샀어요. 졸업 전 선생님께 감사하다는 말씀 꼭 드리고 싶었는데 왜 그렇게 부끄러웠는지 모르겠네요. 내내 후회했어요. 하지만 언젠가는 꼭 뵙고 싶었어요.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모습도 정말 보여드리고 싶었구요. 아마 제 간절한 염원이 우연을 만들었나 봐요. 집사람과 아이 데리고 한번 갈게요. 선생님 정말 감사했어요.” 수없이 연습한 배우의 대사처럼 빠르게 말을 마친 그의 눈은 젖어 있었다. 나는 악수를 청했다. “나도 너무 기쁘다. 참 잘 자라 주었구나.” 그는 내리고, 기차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아내는 눈물을 흘리며 창밖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우영이는 그동안 나에 대한 고마움을 가슴속에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던 거다. 아니 그 고마움을 자신의 성장과 함께 키워나갔는지도 모른다. 그의 말대로 간절한 염원이 우연을 만들어 줄 때까지 잘 가꾸어 아주 예쁘게 만든 것 같았다. 그것도 모르고 혼자 생각에 서운해 하고 야속해 했던 내가 참 칠칠찮게 느껴졌다. “은혜는 돌에 새기고, 원한은 물에 새긴다.”는 속담을 “받은 은혜는 돌에 새기고 베푼 은혜는 물에 새긴다.”는 말로 바꾸면 더 좋지 않을까? 남을 진정으로 돕고 그의 아름다운 앞날을 따뜻한 마음으로 기다려 준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깨닫게 되었다.
서너 달 지나, 우영은 아내와 함께 자신을 꼭 빼닮은 딸을 안고 우리 집을 찾았다. 인형 같은 딸아이를 번갈아 안으며 행복해하는 세 식구의 모습에선 통통 튀는 피아노소리가 계속 들리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