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나도 내 딸의 어머니였으면.
조 헌
‘어머니’라는 말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린 단어이다. 물론 이 세상 무엇보다도 넓고 든든하여 푸근한 느낌을 주는 대표적인 말이지만, 대개의 자식들이 어머니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이 핑 도는 이유는,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이 자식을 향해 한없이 베푸는 희생적 사랑 때문일 것이다.
부모 속 썩이지 않고 자라는 자식은 없다하지만, 부모님 중에서도 유독(惟獨) 어머니에 대해서만은, 생각할수록 고개를 들 수 없는 후회의 애틋한 사연들이 내남 할 것 없이 누구나 있는 것은 아닐까? 분명 자식사랑에 있어서도 선이 굵은 아버지에 비해 섬세하기 그지없는 어머니의 사랑이 더 애틋하고 간절한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어머니의 사랑을 기린 옛 고려인들도 그들의 노래 <사모곡(思母曲)>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호미에, 어머니의 사랑을 낫에 비유하면서 ‘어머니 같이 나를 사랑해 주실 분은 세상에 없다’는 마지막 구절(아소 님하, 어마님?티 괴시리 업세라.) 에 다시 한 번 힘을 주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서너 달 전이었다. 우연히 켜놓은 텔레비전에서 보게 된 미국 비구니 스님의 사연이다. 처음부터 시청했던 것이 아닌 까닭에 그 프로그램의 전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그 스님은 오랜 기간 인도에서 살면서 치열한 자기 수행을 통해 누구나가 다 인정할만한 종교적 실현을 성취한 분인 것 같았다. 그런 분을 국내 종교 단체에서 초청을 했고 많은 사람들을 위해 설법을 마친 스님이 대중들에게 질문을 받는 시간인 것 같았다. 앞서 그가 한 설법의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이름조차 모르는 이 낯선 스님은, 단정한 앉음새와 성성한 눈빛만으로도 준엄한 자기 절제가 두드러져 보였다. 한편 진지한 수도자만이 가질 수 있는 평정심과 온유함마저 감돌고 있어 흔들리지 않고 서있는 커다란 나무를 연상시켰다.
하지만 질문의 내용은 그 스님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라 아주 일반적이고 사적(私的)인 내용들이 대부분이었다. 흔히 일반사람들은 높은 담 속이 항상 궁금하듯이 함부로 들여다 볼 수 없는 종교적 구도자들의 일상적 생활이 무엇보다도 궁금한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우리네 삶과는 전혀 다른, 그래서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그들의 사생활에 대한 신비감 내지 호기심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질문의 내용은 대부분이 출가의 이유나 속가(俗家)에서의 생활, 아니면 현재의 심경(心境) 등을 묻는 것이 고작이었다.
길지 않은 시간 간결하게 답변한 스님의 사적인 이야기를 나름대로 엮어보면 다음과 같았다.
그녀는 미국에서 태어나 평범한 청소년 시절을 보냈고 미국 내 유수한 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천지에 어머니와 단둘이서만 줄곧 생활했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던 그녀는 평소 약했던 몸을 추스르기 위해 인도 명상센터를 다니면서 동양의 예술과 문화 그리고 종교 등에 점차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조금씩 인도 철학과 불교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던 것 같다. 무엇인가를 알아 간다는 것은 느껴간다는 것이다. 조금씩 커져가던 그 느낌은 급기야 출가(出家)를 위해 인도로 갈 것을 결심하게 만들었고 그것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어머니와의 격렬한 갈등을 겪었던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도 간혹 종교적 차이 때문에 겪는 가족 간의 충돌이 예상외로 아주 심각한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을 종종 보지만, 단지 둘만이 서로 의지하고 생활해 왔던 그 모녀의 상황이야말로 도저히 풀 수 없는 엉클어진 실타래처럼 갈등의 골이 더욱 깊어졌을 것은 당연하였다.
아마도 어머니 입장에서는 종교적 문제를 떠나 딸의 출가야말로 자신과의 절연(絶緣)을 선언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을 것이고, 딸의 입장에서는 어머니를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종교적 진리를 향한 비장한 마음이 어머니를 포함한 모든 인연과의 단절을 필요로 했을 것이었다. 아마도 이 두 사람의 충돌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어쩔 수 없는 인정(認定)과 가슴 아픈 감행(敢行)으로 마감되었으리라. 당연히 두 사람 마음속 상처는 깊었을 것이고 처연했겠지만, 서로를 위로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도 없이 서둘러 출발해야만 했다고 한다.
그 후,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30여 년 동안 그녀가 어머니를 만난 것은 대략 10년 정도를 주기(週期)로 하여 단지 세 번이었다고 한다. 그것도 일부러 어머니를 만나러 간 적은 없었고 미국에서 행해진 인도불교의 공식적 행사에서였다고 하니 그녀의 속리(俗離)에 대한 강하고 철저한 의지는 가혹하였던 것이 아니었던가 싶다. 물론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에도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마치 손님처럼 초대되어 참석한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자기 대신 임종을 지켜보았던 친구에게서 들은 어머니의 마지막 이야기는 뜻밖에도 <내가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도 내 딸의 어머니가 되고 싶다>는 말이었다고 한다. ‘다시 내 딸의 어머니가 되어, 인생의 심오한 뜻을 세워 자신의 삶을 보다 적극적으로 살고자 했던, 그 딸의 인생을 다시는 미련하게 붙잡지 않고, 그 누구보다도 빨리 이해하여 진정으로 도와주고 싶다.’고하며 눈을 감았다고 한다. 참말로 놀랍고도 슬픈 마지막 소망 - 실로 감동이 아닐 수 없었다. 사랑하는 딸의 앞길에 잠시나마 장애가 되었던 지난날에 대한 절실한 회한(悔恨)이 이런 마지막 소망을 딸에게 남기게 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애절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홀로 남겨두고 냉정하게 떠난 딸, 그리고 그 긴 세월동안에 단 세 번 밖에 만날 수 없었던 무심한 딸, 더욱이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도 그리워해야만 했던 그 딸에 대한 감정은 누가 생각해도 서운함을 넘어 강한 원망이었을 것이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태어나도 내 딸의 어머니가 되어 인생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싶어 하는 한 서양어머니의 마음에서 한없는 숙연함이 느껴졌다. 과연 어머니의 사랑에는 동서(東西)도 없고 고금(古今)도 없는 것일까? 낫날처럼 잘 벼려진 섬세하고 한없는 어머니의 사랑은 고려인들이나 미국인들이나 그 간절함에 있어 다를 바가 진정 없는 것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