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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권순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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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어가다    
글쓴이 : 권순예    26-06-15 20:47    조회 : 38

 우리 '성가정' 모임은 아이가 여섯 살 되던 해, 성당 유치원에서 시작되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들로, 산으로, 계곡으로 참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연말이 되면 각자 음식을 만들어 한 집씩 돌아가며 모임을 가졌다. 지인을 통해 문산에 200여 평의 밭을 얻었을 때는 함께 고구마를 심고 캤다. 아이들은 고구마가 땅속에서 어떻게 자라는지 스스로 보고 배우며 자랐다. 

 함께 남해로 여름휴가를 갔을 때의 일도 생생하다. 아침 일찍 도착한 우리는 일출을 보기 위해 보리암으로 올라갔다. 바다 위로 이글이글 솟아오르는, 마치 용광로 같던 태양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 본 장관이었다. 아이들이 이글거리는 대양을 향해하는 함성 소리를 내 질렀는데 지금도 들리는 듯 하다. 살면서 문득문득 그때 그 보리암의 풍경이 그리움처럼 떠오르곤 한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모임은 자연스럽게 부부 모임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주말마다 산을 자주 찾았는데, 어느 날 가리왕산에 가기로 뜻을 모았다. 시댁과도 아주 가까이 있는 산이다. 가리왕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정선, 장전리, 진부, 대화 등 네 곳으로 나뉘어 있었다. 하산 길에 정선 장에 들러 나물을 사기로 의논한 끝에, 우리는 코스가 가장 가까운 정선 쪽에서 올라가기로 하고 새벽 4시에 길을 나섰다.

 일행을 휴게소에서 만나 정선 계곡 깊숙이 들어갔다. 계곡 물소리와 새소리가 맑았다. 숲속을 향해 들어오는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나뭇잎의 향기를 마시며, 우리는 어렵지 않게 칠부 능선에 닿았다. 그러나 칠부 능선부터 정상까지는 숨이 턱에 차는 급경사였다. 고도가 높아서 그런지 나무들이 자라지 못해 그늘이 없었다. 우리는 내리쬐는 햇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정상으로 향했다. 

 정상에 오른 뒤 가져온 간식을 먹으며 쉬고 있을 때였다. 남편이 여기 나물이 있다며 큰 소리로 일행을 불렀다. 남편의 손에는 미나리처럼 길쭉한 참나물 한 움큼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우리에게 뜯은 나물을 하나씩 쥐여주며 똑같이 생긴 것을 찾으라고 했다. 강원도 태생인 남편은 산나물의 종류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발을 디딘 그곳이 바로 천연 참나물 밭이었다. 우리는 배낭 가득 싱그러운 참나물 향을 채워 산을내려왔다.

 그날 이후, 성가정 식구들은 참나물과 취나물의 향을 잊지 못해 5년 동안이나 가리왕산을 찾았다. 어느 해인가에는 산불 감시원에게 걸려 혼이 나기도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다들 무릎이 시려 산을 타기 힘들어졌다. 그래서 요즘은 해마다 5월이 되면 산 대신 장돌뱅이처럼 나물을 사러 정선장, 봉평장, 평창장, 대화장을 찾아다니고 있다. 

 올해 5월에도 우리는 나물을 사러 정선 장에 가려다 평창 장을 향해 달렸다. 장에 도착하자마자 꼬르륵거리는 배를 콧등치기 국수와 메밀전, 감자부침, 그리고 시원한 막걸리로 든든하게 채웠다. 자동차 트렁크가 빵빵하게 나물을 샀다.

 돌아오는 길에는 작년에 벌초를 갔다 오면서 들렀던 안흥찐빵집을 다시 찾았다. 늘 길게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 번거로운 곳이지만, 이번에는 찐빵보다 그 자리를 지키고 계실 주인 할머니를 뵙고 싶었다. 도착해보니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나셨다는 것이다. 

 살아계실 때는 사시사철 뵈었고, 돌아가시고 부터는 해마다 2번 씩은 뵌 것 같다. 지난 3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언제나 그 자리에 계셨던 할머니였다. 나에게 안흥찐빵은 곧 할머니 자체였다. 높고 험한 산을 더는 오르지 못하게 된 것처럼, 단골집 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시니 가슴 한구석이 헛헛해진다. 

 갓 쪄낸 하얗고 보드라운 찐빵의 붉고 달콤한 온기를 바라보며 문득 깨닫는다. 나 또한 이 찐빵과 함께 그리운 시절을 통과하며 물들듯 늙어가고 있다는 것을. 흘러 가는 시간 속에서 언제까지 정겹고, 행복했던 이길을 성가정 식구들과 함께 달릴 수 있을까.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함이 달콤한 팥소처럼, 가슴 속 깊은 곳으로 부터 묵직하게 번져오는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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