푈클링엔 제철소를 전시하다
“엄마, 21일이 전시회 오픈이라 9월 16일에 경주에 도착할꺼야.”
2002년 여름, 독일에 있는 딸아이에게서 짤막한 전화가 왔다.
“전시 준비해야 하므로 집에는 못 갈 거 같아.”라고 했다.
경주의 선재미술관에서 딸이 다니는 독일의 자르 조형대학을 초청한 교환전시였다. 마침 아이의 전화를 기다렸으므로 우리 부부는 전화를 받자 곧 경주를 찾았다. 미술관 앞에는 백남준의 비디오 작품 다섯 점이 설치되어 있었다.
선재미술관은 김우중 대우 회장 부인이 운영하고 있었는데, 미국 유학 시절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들 선재의 이름을 딴 것이다. 미술관에는 김 회장의 아들 사진이 걸려 있었다. 사진을 보노라니 그 부모의 고통이 전이되는 느낌에 목이 메어왔다
우리가 도착하니 독일 친구들은 바다 구경을 나가고 딸 혼자서 일을 하고 있었다. 3년 만의 만남이라 너무나 간절한 마음으로 딸을 꼭 껴안았다. 전에는 딸을 포옹하면 나긋나긋하고 향긋한 냄새가 났었는데, 이제 아이에게선 땀 냄새만 진동했다.
“이건 설치미술이 아니라 중노동이네.” 하고 중얼거렸다.
미술 수업시간에 중금속과 나무를 자르다 보면 항상 먼지 범벅이 된다는 말을 자주 딸에게서 듣긴 했지만, 그러나 늦은 시간에 통풍도 안 되는 작업실에서 일하는 아이의 땀에 전 뒷등이 애처로워 보였다.
전시는 <같은 그리고 다른>이라는 주제로 세계문화유산을 주제로 진행하는 작업들이었다. 조각, 사진, 설치미술, 전자 매체, 음향 설치에 이르는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있었다. 이 전시는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독일의 푈클링엔 제철소와 한국의 또 다른 세계문화유산인 경주 석굴암을 연결하는 프로젝트이다.
푈클링엔 제철소는 매우 유서 깊은 산업문화유산으로서 특히 제2차 세계대전에는 독일의 전쟁 수행에 중요한 역할을 했었다. 그러나 이제 문을 닫은 제철소는 상당 부분을 자르 조형대학의 작업실로 내어주고 있었다.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두 세계문화유산의 이질성이었다. 현대 산업사회의 원동력으로서 대량의 강철 자재를 생산해 온 대표적인 장소로서의 제철소는 무력과 경제력을 통해 국익을 관철하려 했던 곳이었고 이에 반해 경주 석굴암은 동양의 종교의 성소로서 자연과의 조화를 상징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는 딸이 다니는 자르 조형대학 학생들이 2년여에 걸쳐 진행해 온 프로젝트이다. 많은 작품 중에서 특히 내 시선을 잡아끈 작품들은 제철소 주변에서 채집한 100여 종의 식물들의 분포도를 드로잉으로 작성한 섬세하고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그리고 한국인 유학생 김지섭 씨의 <부처님>은 온몸에서 빛이 살아났다. <부처님>은 아주 높은 녹슨 강철 파이프 위에 원형의 거울을 설치한 다음 미세한 바람으로 거울을 움직이게 하여 사방으로 부처의 빛을 반사하는 작품이었다.
딸의 전공은 설치미술이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사진 작업이었다. 전차에서 내려 작업실까지 오는 길바닥을 각각 다른 사람에 의해 촬영된 두 개의 영상을 통해 찍은 것이다. 그것은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놓치기 쉬운 또 다른 시각이 있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많은 작품이 있었으나 대부분 무척이나 난해했다.
넓은 전시관에 진열된 작품들은 흡사 푈클링엔 제철소를 재현해 놓은 듯했다. 그것을 보니 독일에 갔을 때 제철소에 들렀던 일이 떠올랐다. 한 달 넘어 여행하면서 평화롭던 독일의 풍경과 아름다운 문화만 보다가 한적한 교외에 있는 거대한 제철소를 올려다보니 괜히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시퍼런 녹이 슨 용광로들은 오랜 시간 앞에서도 웅장하고 당당했다. 여섯 개의 용광로를 가동했던 17,000여 명의 노동자는 매일 5,000톤의 철을 생산했다고 한다. 독일군이 연행한 소련의 포로들,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전쟁포로들로 구성된 강제 노역자들은 비참하고 비인간적인 조건에서 강제노역에 종사했다. 그런 설명을 듣다 보니 나치의 악랄한 유대인 탄압이 떠올라 등골이 서늘했다.
딸이 사는 도시인 자브뤼켄 근교의 푈클링엔은 제철소 덕분에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제철소의 불이 꺼진 이제는 쇠락한 작은 소도시일 뿐이었다. 여행을 갔을 때 딸아이 결혼식 준비로 그 도시의 마트와 백화점을 돌아다녔다. 백화점이나 길거리 휴식 공간에 있는 그 도시의 모든 의자는 철로 되어 있었다. 그것은 제철소가 인근에 있었다는 증표였던 것 같았다. 저체온인 나는 이 의자들이 불편해서 구시렁거렸던 기억도 떠올랐다.
딸은 경주 전시가 끝난 후에도 남아서 며칠 동안 철거 작업을 한다면서 먼저 서울로 올라가라고 했다. 딸아이가 남아서 처분해야 할 것은 그들이 남긴 잔해들, 쇳덩어리와 모래와 폐품 조각들이었다. 작가들이 2년여 동안 힘들게 창조한 그 작품들은 조각조각 해부 당하여 지상에서 쓰레기로 사라질 것이다. 물론 사진으로는 남겠지만.
그날 밤 딸아이는 호텔로 와서 늦게까지 작품 설명의 번역까지 마치고 씻지도 못한 채 곯아떨어져 잠이 들었다. 잠든 아이의 앳된 얼굴을 보면서, 돌이킬 수 없는 것을 돌이키게 하는 비애가 짙게 퍼져 한없는 아쉬움으로 몸을 뒤챘다.
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종일 아무 곳이나 손이 닿는 곳이면 묵묵히 앉아 주야장천 그림만 그려댔다. 미술학원에 보내지 않았는데도 다섯 살 때 세계적인 지휘자인 카라얀의 지휘 모습을 사진처럼 리얼하게 그려서 주위에서 감각이 뛰어나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그런데 돌연 아이는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으로 택했다. 그때 나는 딸의 선택을 믿었으므로 벽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는 유학 가서 순수미술, 그중에서도 설치미술로 또 전공을 바꿨다. “엄마, 나 순수미술 하면 어떨까.” 딸이 물어왔을 때 “네가 절실하게 하고 싶은 것 하라.”고 말했던 것이 조금 후회로 남는다. 집에 그녀의 수채화 한 점 없는 것이 아쉽기 때문이다.
시월 끝자락, 딸은 독일로 돌아갔지만 나는 아이가 위층에서 사뿐사뿐 내려올 것만 같았다. 아이들이 한국에 왔다 갈 때마다 홍역처럼 치르는 이 절차.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차고 기운은 다 빠져나가고 껍데기만 남은 듯하다. 이별은 자주 겪어도 항상 이렇게 처음인 듯 생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