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백으로 둘러진 융프라우 꼭대기 라운지에 앉았다. 안개 짙은 설산을 바라보며 백색의 겨울을 느끼자니 불현듯 삼각산에서 기도하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35살의 겨울이었다. 삼각산을 오르고 있는 나는 참담했던 지난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장사의 ‘장’자도 모르다가 덜컥 수예점을 경영한 결과 고생만 늘어지게 하고 몇 년 만에 쫄딱 망해버렸다.
세상 죄를 다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고통을 떠올리며 산으로 오르는 길은 사위가 고요했다. 햇살도 내 마음을 아는지 뭉게구름에 가려져 있었다. 망한 자에게 돌아오는 건 질시와 손가락질이었다. 자존심이 그것 밖에 남은 게 없건만 바닥을 쳤다. 자아도 무너져 내렸다. 억울하고 비참해서 말할 수 없이 슬펐지만 하도 울어서 수도꼭지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눈물마저 메말랐다.
삼각산 꼭대기에는 천막기도원이 있었다. 산으로 오르는 길의 양옆에 늘어선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만 남아서 침울한 내 마음을 더 부추기고 있었다. 만신창이가 된 참담해진 마음을 붙잡고 산으로 올랐다.
낙심한 자들의 마음만큼이나 낡고 허름한 천막기도원은 하루 24시간 끊어지지 않게 릴레이 기도를 하는 곳으로 유명했다. 기도제목은 딱 하나,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다. 그 제목 한 가지만 기도를 해도 자기가 원하는 소원은 하나님께서 다 들어 주신다고 했다. 딱히 신께 뭘 받고자 해서 삼각산을 오른 건 아니었다.
막다른 골목에서 미래의 진로를 결정하기 위해 먼저 기도를 선택한 거였다. 어쩔 수 없는 걸음이었다. 하나님께 항복하는 심정으로 자포자기했다. ‘이제 신학교만 열심히 다니겠습니다.’하고 말이다. 억지로이지만 순종하는 의미였다. 잘 나가는 유명한 주의 종이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단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일생을 산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여겼다. 더 무엇을 바랄 건가.
산에 오르기 전 나는 낮에는 수예점을 경영하고, 밤에는 신학교를 다녔다. 돈을 벌면서 공부하는 주경야독이지만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가 모두 놓치고만 케이스가 나였다. 경영의 노하우도 없이 자영업에 뛰어든 게 잘못이었다. 장사치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었다. 방구석에 앉아서 수틀만 바라보며 수만 놓던 내가 장사에 뛰어든 게 잘못이었다.
여기 저기 부르짖는 기도소리가 천국에 닿을 듯한 천막기도원에 오르니 나 같은 사람이 많았다. 목회를 하다가 사기를 당해서 망하고 온 목사와 전도사들. 결혼생활에 파탄난 자, 빚진 자, 병든 자, 새 사업을 구상하는 자, 신학교를 가야하나 말아야 하는 가 갈팡질팡하는 자, 배신당한 자, 모함당한 자, 억울한 자, 슬픈 자, 원통한 자 등등에다가 산에 올라와 밤새워 자기에게 닥친 문제와 소원을 위해 기도하는 철야꾼들이 줄을 이었다. 참 보기 좋은 풍경이었다. 별천지가 따로 있었다. 산꼭대기 기도원의 풍속도가 그랬다.
나라를 위한 기도가 하늘만큼 쌓인 천막기도원은 아침에는 구청에서 철거대원이 올라오기 전에 천막을 걷었다가는 저녁에 그 천막을 다시 치고 잠자리를 마련하는 것이어서 열악하기 짝이 없는 환경이었다.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생활과 비슷했다.
이 기도원에서의 첫 발자국은 우리 교회 사모님과 함께 찍었다. 그날은 ‘어머나, 어떻게 이런 곳에서 기도를 할 수 있나!’, 이런 곳에서 기도하는 특별한 사람들도 있었구나.‘, 놀랍기만 했다. 아니러니였다. 나는 사업을 할 수 없이 접고 나서야 내 발로 그 산을 오른 것이다.
처음부터 24시간 릴레이 기도멤버가 되는 건 아니었다. 기도원에 오자마자 할 수 있는 기도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고통스럽고 쓸쓸함에 천지가 어두웠다. 하나님과 화해의 손을 붙잡기 위해 그 멤버가 되는 걸 기다리며 캄캄한 밤, 산꼭대기 넓적한 바위 위에 앉아서 기도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긍휼의 은혜를 베푸소서!’, ‘사람을 의지하지 않게 하소서!’, ‘주님만 의지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검푸른 빛깔의 하늘 아래 펼쳐진 서울 전경이 별빛을 뿌려 놓은 듯 아름다웠다. 불빛이 저리도 고울 수 있는가? 그곳에서 알았다. 삼각산은 영하 20도가 넘는 추위가 이어졌다.
산 아래하고 영하 5도가 차이난다고 했다. 깊은 적막과 어둠을 깨우는 천막기도원에서 영하의 추위와 싸우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24시간 기도하는 멤버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나 혼자 자랑스럽기도 하다. 총을 들고 전장에 나가야만 용사인가 말이다. 기도하는 사람도 나라를 위한 용사이다. 사실 극성스럽게 나라와 민족을 위해 밤새워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우리나라가 이만큼이나마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부류 중에 하나가 나라는 사람이다.
릴레이 기도를 하자면 새벽에 기도 바톤을 이어야 할 때가 있었다. 새벽 1시, 2시, 3시 기도할 시간일 때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와 같다고 느꼈다. 산 제물이 따로 없었다. 내가 기도의 제단에 바쳐지는 제물이었다. 몸이 천근만근이어서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실 제물이었다. 산 아래 동네에 내려가서는 그 즉시 자격이 박탈되었다. 제물 된 자에게 주어진 규칙이었다.
그 외에도 여자는 세끼 식사 중에서 한 끼의 식사를 마련해야 했다. 기도원에서 숙식하는 자들의 살림을 한번은 해야 한다는 거다. 새벽에 일어나 백일동안은 기도원 식구들의 아침식사를 챙겼다. 아니면 기도할 자격이 없었다. 별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곳은 두 끼만 먹었다. 한 끼는 무조건 금식이었다. 공기도 좋은데다가 산중턱을 오르내리니 소화도 잘 되어서 수시로 배가 고팠다. 그리고 그곳은 말할 수 없이 추웠다.
릴레이 기도하는 장소로 올라가는 바위에는 굵은 밧줄이 매어져 있었다. 줄을 잡고 올라가야 할 만큼 가파른 절벽이었다. 장갑을 끼고도 겹겹으로 양말을 신고 있어도 미끄럽기도 하거니와 발도 꽁꽁 손도 꽁꽁 얼어있었다. 그 상태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와도 싸우면서 절벽 위에 앉아서 몇 겹으로 만든 비닐을 뒤집어쓰고 2시간가량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기도하는 것이다.
어떤 날은 감기가 들어서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럴지라도 부르짖어 기도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바위 아래에서 기도원 원장의 호통 치는 소리가 올라왔다. “소리 지르며 기도해!”라고 말이다. “주여, 주여, 주여, 우리나라를 불쌍히 여기소서!”
기도 바톤을 바꾸기 전까지 “주여!”에다가 따발총 같은 말들을 줄줄이 엮어서 기도를 했다. 벼는 백일이 되어야 고개를 숙이며 익는다고 한다. 기도하는 습관을 백일동안 붙이면 몸이 자동으로 기도에 반응하게 된단다. 그곳은 그래서 백일동안 작정기도를 릴레이로 면 중 내내하는 기도원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기도소리, 장엄한 기세를 지닌 산과 바위들, 자연의 신비를 시시각각 느끼며 겨울은 깊어가고 있었다. 삼각산 그 꼭대기에서 부르짖는 발성 기도를 다섯 달을 했다. 한반도를 그려놓은 것 같은 바위 속에서 혼자서 물만 마시고 하는 금식기도 30일도 무사하게 끝냈다.
날아갈 듯 몸이 가벼워졌다. 온갖 잡사로 어두웠던 영혼이 순수해진 것 같았다. 마치 눈꽃처럼 순백으로 변한 느낌을 받았다. 그동안 지은 모든 죄를 회개하고 정결한 심정으로 하산했다. 휴학했던 신학교를 다시 다녔고, 목회대학원, 선교대학원, 상담연구원을 거쳐서 목사가 되었다. 하나님을 아는 공부만 12년을 했지만 지금은 아는 게 별로 없다.
단 한 가지 확실하게 아는 것은 하나님은 이제도 내일도 그리고 세상 끝 날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거다. 요리조리 빠져 나가려고 발버둥 쳐도 제 자리로 도로 오고야 마는,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우연이듯 필연적으로 거치게 되는 수도사의 거친 과정을 경험했다. 모든 것이 신의 섭리겠지만 지난 일들을 생각하면 문득 문득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전심을 다해 기도하던 그때같이 행복한 순간이 다시는 주어지지 않을 것 같아서다. 그렇게 젊은 시절 하나님과의 순수하게 가졌던 그 시간이 보물같이 소중하다. 열악한 곳에서의 환경적 경험이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때마다 좋은 치료제와 방부제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의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융프라우에서 한 점의 먼지도 없는 순백의 시간을 대하니 순수했던 아름다운 시절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산을 바라보던 눈을 거두고 라운지 주위를 둘러보니 컵라면을 맛있게들 먹고 있었다. 보물단지처럼 배낭에 모시고 온 라면을 먹기 위해 4유로를 주고 따뜻한 물을 공급받았다. 둘이 죽어도 모른다는 그 라면이 그다지 맛나지 않았다. 장가계의 천문동 앞에서 먹던 신 라면은 천상의 맛이었는데……. 이곳은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