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두 장 남은 달력을 물끄러미 바라보자니 빨간 글씨로 표시된 12월 25일 ‘크리스마스’ 가 눈에 띈다. X-mas로도 표현되곤 하는데 엑스-마스라고 읽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X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그리스(희랍)어의 ‘Χριστ??’ 머리글자이기 때문이다.
루터는 크리스천의 삶이란 자기 자신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자신의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 곧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신앙을 통해 이웃에 대해서는 사랑을 통해 살아가는 존재라고 주장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이맘 때 이웃을 더 돌아보게 되는 것은 아마도 루터의 말 때문이 아닐까. 연중행사처럼 기분이 좋아지는 이 날이 언젠가부터 내 어깨에 무겁게 다가오는 것은 비단 나라와 가정의 경제상황이 좋지 않아서만은 아니다. 나름 흥청거릴 나이도 아니려니와 크리스마스의 깊은 의미를 깨닫고 보니 습관처럼 분위기 따라 성가를 불러대고 연주하던 때가 떠올라 부끄럽기까지 하다.
크리스마스의 유래는 영국 고전어 ‘그리스도의 미사(Cristes maesse)’ 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의식으로 서방 교회에서는 AD336년 경 12월 25일에 처음으로 ‘우리 주님의 탄생 기념제’ 가 실시되었다. 그 날짜는 로마 황제 아우렐리우스의 생일을 기념하는 축제 ‘정복되지 않는 태양의 탄생(Natalis Solis Invicti)’ 에 맞서서 선택되었다. 알렉산드리아와 동방 교회에서는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날과 탄생한 날이 같다고 믿었기 때문에 1월 6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한다. 이에 따라 아직도 일부 동방 교회들은 이날로 성탄을 기념하는 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성경에는 크리스마스란 명칭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서방 가톨릭이 그리스도의 탄생을 삼중의 탄생(하나님 아버지의 품에서, 마리아의 몸에서, 믿는 자들의 영혼에서)을 기념하는 미사에서 이 이름이 나타나기도 한다.
프로테스탄티즘의 근본 원리는 사람은 믿음에 의해서만 의로워 질 수 있다는 것이다. 믿음과 구원에 관한 종교적 논쟁이나 해석은 여기서 하지 않겠으나 내가 가장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 그것은 바로 내 의지와 노력이 없어도 신이 주신 은혜의 선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게으르고 무지한 나에게는 섬광과 같은 복음이 아닐 수 없다.
스스로의 참선이나 고행을 통하여서도 아니고 남에게 베푸는 자비나 적선으로도 아니며 머리가 터질듯 한 지식이나 철학으로도 아니니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러니 그 감사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가에 대하여는 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사람의 욕심과 나태함, 또는 무관심으로 행하지 못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지각이 있는 많은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관습적 크리스천들을 꾸짖고 있다. 입으로는 사랑을 부르짖지만 구제와 봉사에 관하여는 남의 일로 여기기 때문이다. 묘하게도 문명이 발달 할수록 세상은 살기 힘든 시대가 되고 있다.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인간적으로는 더욱 그렇다. 자비와 사랑이 핵심인 종교마저 참다운 사랑의 모양이 흐릿하다.
불안과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제대로 알려 크리스천으로서 자세를 바로하고 변질 되어진 그들만의 축제가 되지 않기를 소망한다.
여러 가지 이유로 삶이 힘든 세상 모든 이들에게 신의 은총이 흰 눈처럼 쏟아지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