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서 자랄 때는 머슴아들 하고 자치기도 하고 줄넘기도 했는데 우리가 노는 곳에는 그들이 따라 다녔다. 잘 놀아 주면 다행이지만 골탕을 먹일 때는 울어버린 적도 많았다.
여름 냇가에서 목욕을 하고 있으면 그들은 휘파람을 불어서 암호를 보낸다. 어느새 다 모여들어 주위에 삥 둘러 서서 우리가 물속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린다. 그러다 심술이 나면 옷을 가지고 도망을 간다. 어떻게 하나! 큰 소리로 울고 있으면 동네 어른들이 와서 안아주며 달래주곤 했다.
그렇게 자라서 아가씨가 되어 멋도 부리고 예쁜 모습으로 변해 갔다. 고향에서의 추억을 새기며 부모님을 따라 서울에 온 그녀는 모든 게 낯설고 겁이 났다.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내려서 보니 눈앞이 캄캄했다. 깜부기나 뽑아먹고 자란 그녀는 겁이 났다.
서울 생활이 조금 익숙해져 그녀는 혼자서 외출도 하게 되었다. 동네를 다니다 보면 껄렁껄렁한 모습의 그들이 보인다. 휘파람을 불며 멀리서 소리를 지르며 “으이 아가씨, 긴 머리가 멋진데. 웃지 말고 그냥 가라고, 웃으면 반하니까 돌아보면 안돼, 아가씨.” 망신이다. 검정색 모자를 눌러 쓰고 착 달라 붙은 청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비스듬하게 서있는 꼴이 노는 머슴아 같이 보였다. 수줍어 고개도 못 돌리고 죄인처럼 땅만 보고 걸었다.
어느날 친구와 영화를 보러 갔다. 그때만 해도 창고처럼 지어진 곳에서 가수들이 공연을 하기도 했는데 머슴아들이 미녀 가수들이 나와 노래를 할 때 손가락을 입에 대고 휘파람을 불기도하고 영화가 상영되는 순간에 필름이 끊어지고 캄캄하면 더 크게 아예 일어나서 휘파람을 불기도 했다.
고향에 살던 아제는 여름 밤 둥천에 나와서 큰 소리로 휘파람으로 유행가를 아주 잘 불렀다. 그 곳에 나와 땀을 식히던 어른들도 휘파람 소리를 들으며 더운 여름 밤의 지루함을 달래주기도 했다.
시내를 가기 위해 버스정류장을 향해 가고 있는데 어디선가 휙하고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아이구 어떻게 하나! 심심하면 나타나서 겁을 주곤 하던 그 머슴아다.
구두를 신어서 뛸 수도 없는데 점점 가까이 오더니 “에이 아가씨, 어디 가신다고 빨리 가는 거야.” “거기 좀 서 봐.” “벙어리야 말 좀 해봐, 벙어리 아니야?” “긴 머리가 오늘도 예쁜데.” 딱 걸렸다. 이럴수록 침착해야지, 절대로 웃거나 쳐다봤다간 큰일이다. 계속 앞만 보고 걷고 있는데 갑자기 앞에 와서는 팔을 벌려 가로 막고 섰다. 그는 그녀가 지날 때마다 보고 있었다고 했다. 한 번 만나주면 그냥 가겠다며 협박투로 말했다.
대답 대신 고개를 끄떡하니 “알았다.” 하고는 휘파람을 불며 큰 돌을 발로 걷어 차며 신이 나서 간다. 무슨 저런 남자가 있나. 길을 가는데 자꾸만 뒤에서 따라 오는 느낌이 들어 궁금하기도 했지만 어디서 보고 있지 않을까 겁이 났다.
언젠가 시골에 살고 있는 친척집 가는 길에서 우연히 만난 머슴아가 있었다. 출렁 다리를 건너기 위해 서있는데 갑자기 내 앞에 소 풀을 베어서 가득 실은 리어카가 멈추어 섰다. 깜짝 놀라서 보니 그는 빙긋이 웃으며 “아가씨, 어디서 왔습니꺼?” 하고 말을 건넨다. “저어 서울에서 왔어요.” “아, 그렇습니꺼. 다리를 건너려면 구두가 불편 할 텐데 리어카에 타고 건너면 편할 낍니더”. 하고 여행용 가방을 받아 싣고 손으로 풀을 고르게 깔아서 앉을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손목을 잡아주며 앉게 했다. 손을 짚고 있는데 갓 베어온 풀 잎들이 손가락 사이로 삐죽이 나왔다. 엉덩이는 젖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황금으로 만든 방석이 이처럼 좋을까! 여왕처럼 우아하게 앉아 혼자 좋아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리어카를 끌고 가는 그의 표정은 볼 수가 없지만 즐거운 마음은 똑 같지 않을까! 하는 얄궂은 생각도 들었다.
공중다리가 출렁거리고 고운 풀 냄새에 취해서 온 몸이 자연과 함께 숨을 쉬는 듯 향기로웠다. 흐르는 강물도 내 맘을 아는지 무심히 흐르고 약간의 노을이 비쳐 반짝이니 영화의 한 장면을 연출하는 것 같았다.
“예쁜 아가씨, 신나지요. “조금만 가면 됩니다.” 불편해도 조금만 참으소.” 큰 소리로 말을 한다. “네.” 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속으로 다리가 좀더 길었으면 싶었다. 내려야 할 때가 되었나 보다. 편편한 곳에 리어카를 세우고 그녀의 손을 잡아주며 내리라는 시늉을 한다. 조금 미적거리다가 겨우 몸을 일으키는데 풀이 앞으로 쏟아져 내렸다. 미안한 마음에 그냥 웃었다. 무겁기는 무겁나 보다. 몸무게가 탄로 난 것은 아닌지 부끄러웠다.
바닥에 있는 풀은 안중에도 없고 상대방의 배려에 신경을 쓴다. 그는 가방을 내밀며 “조심해 갑시더.” 그는 휘파람을 불며 돌아서 갔다.
아쉬움 속에 들려오던 휘파람소리는 그의 못다한 이야기가 아닐까 하고 그녀는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 보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질 않고 지나간 리어카 자국만 남아 있었다. 휘파람이 두려움뿐 아니라 이렇게 포근할 수도 있구나.
2010-02-25 합천신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