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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번 버스를 아세요?    
글쓴이 : 공인영    12-06-04 21:57    조회 : 4,079

 
                           58번 버스를 아세요?

                                                   
                                                                 

  세월이 제 맘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그때와 한번이라도 더 재회하기 위해 정류장마다 걸음을 멈춘다. 그러면 혹, 숨었던 기억들이 토큰처럼 매표소 구멍 안에서 도르륵 굴러 나오지 않을까. 환청처럼 들리는 소리에 자꾸 돌아보지만 아무도 없는 내 망막 위로 추억의 버스 한 대 연기를 뿜고 지나간다. 그 뒤로 귀퉁이가 닳아버린 흑백 사진 한 장 먼지처럼 풀풀 내려앉는다.
  널찍하게만 보이던 등교 길이 이제는 엿가락처럼 가늘게 변해버렸다. 그 앞을 지나갈 때면 누군가 덜미를 잡아당기는 것 같아 괜히 걸음부터 바빠지던 파출소 건물도 조금만 바뀐 채 그대로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작은 계집애가 한 뼘쯤 못 미친 자리에서 두려움도 잊은 채 쪼그리고 앉아 있다. 막 지나간 버스가 꽁무니로 토해낸 매연을 올칵 삼키고는 그만 토악질을 하는 중이다.
  차를 타는 일이 정말 무섭고 싫던 아이. 오죽하면 차를 타지 않고도 멀미를 해대던 참 심각한 멀미쟁이였을까. 기침까지 하느라 작고 가느다란 눈은 벌겋게 충혈이 되고 눈가엔 물기마저 번진다. 목구멍이 제법 아려올 만큼 다 게워내고 허전해진 기분을 친구들을 알기나 할까. 슬픈 것도 아닌데 어쩌자고 서글픈 심정이 되곤 했는지 모르겠다.
  바로 그 순간 하늘을 받치고 있던 전봇대, 길고 느린 시선으로 내려와 마주친 계집애에게,
‘괜찮니 꼬마야?’
어머나, 전봇대가 말을 하다니 잘못 들은 거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쳐다보는 거기에 정말 키다리 아저씨처럼 전봇대가 걱정스런 눈길로 내려다보고 있질 않은가. 들어본 적 없던 저 다정한 목소리가 지금 귓가를 따뜻하게 맴돌고 있는 게 신기하다.
  계집애는 미적미적 다가가 차가운 그의 허리를 꼭 껴안는다. 품어 안은 전봇대에 제 몸을 기대고는 토악질 끝의 울렁임을 잠시 달래는 모양이다. 그리고는 퀭한 얼굴로 하릴없이 두어 번 전봇대를 돌고서야 흘러내린 가방 끈을 다시 올려 멘다. 이제 집으로 가기 위해 길을 건넌다. 습관처럼 손을 들며 이쪽 저쪽을 살피는 그녀를 따라 잠시 부신 햇살 너머로 한 걸음 따라 들어선다. 누군가 저쪽에서 나비처럼 손짓을 하고 있다.
  계집애를 제치고 나선 급한 시선 앞에 공원은 푸른 그림자로 부풀며 다가온다. 우리에겐 공원이기보단 숨기 좋을 만큼 우거진 숲이며 즐거운 골짜기였는데. 부드러운 흙 언덕과 빽빽한 나무 투성이의 그곳으로 몸은 마치 요정처럼 철망도 아랑곳없이 가뿐하게 통과한다.
  수십 년은 족히 넘었을 늙은 나무들이 그 커다란 무게로 기울어진 채 흙 사이로 뿌리가 갈고리처럼 나왔다. 마치 유연한 몸을 놀리며 호흡을 멈춘 채 노려보는 뱀처럼. 한 순간, 저 갈래갈래 퍼진 뿌리의 한쪽이 꿈틀거리며 잽싸게 기어 나와 온몸을 칭칭 동여맬 것처럼 무섭기도 했는데.
  바람을 헤치며 뛰놀던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티 없는 웃음이 유리구슬을 쏟은 듯 숲의 여기저기로 와르르 흩어진다. 주름진 작은 벌레들이 기어간 나무 위로 같이 돋던 내 소름들, 깨진 항아리 조각의 반질거림, 그 위에 소꿉장난한다고 퍼 담던 붉은 흙의 고슬한 감촉, 코흘리개 친구들의 때 자국 선명한 손들이 마냥 꼬물거리며 하늘을 향해 손사래도 친다.
  하늘을 가려버린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들어앉아 놀다가, 어느 새 비껴 선 높고 파란 하늘가로 다시 나와 풀 조리도 몇 개씩이나 만들어 주던 친구들은 모두 어딜 갔을까.
  장기판에 흥이 겨운 노인들도 지금처럼 등 떠밀린 문 밖 출입이 아니라 손자 녀석 고사리 손에 이끌려 마실처럼 머물던 반나절의 동화가 거기 그대로 펼쳐진다.
  어느 무더운 여름이던가. 시원한 바람에도 헉헉대던 우리 앞에 무대 위로 등장하는 연극배우처럼 아이스케키 장사 두 명이 걸어오며 외치기를,
  ‘아이스케키.하나에 오 원, 두 개에 십 원'
  그러면 동생 같은 아이 별나게 따라하기를‘나도’
열 번을 해도 열 번이 다 똑같아, 따라한다고 꿀밤깨나 주련만 끝까지 심성 좋게 주고받는 둘의 장단에 어느 새 우리도 흉내 내며 배꼽을 잡던, 그때 그 개그가 아무래도 억지웃음에 신물 나는 이즈음 개그 판의 원조는 아니었을까.
  뜨거운 햇살에 잠 오듯 눈을 감으니 아이스케키의 달콤함과 함께 그만 녹기 시작하는 어린 시절이 내게 손짓하며 말한다.
‘정말 나를 잊었니?'
어느 세월이었더라. 이런 풍경 하나씩 심으며 이야기가 자라던 때가. 아, 지금 또 저기 효창동 언덕길로 58번 버스가 휘익 지나간다.
 

                                                                                       <수필시대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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