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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월의 제주 (우물가 수다)    
글쓴이 : 고보숙    12-06-20 19:06    조회 : 3,197
                 4 월의 제주
                                                                   고보숙
 
  “조 기 회 가 자 ~~!”
동이 트기도 전에 5~6학년 선배들이 하급생들을 깨우러 동네를 돌아다니며 외쳐댔다.
여름방학이면 늦잠자는 습관을 없앤다고 이른 새벽에 아이들을 학교로 불러모아 운동장에서 간단한 체조를 한 뒤 동네청소를 하도록 숙제를 냈다.
꿀맛같은 단잠에 빠져 있던 우리들은 엄마보다 일찍 일어나는 일이 대단한 선심을 쓰는 일인냥 온갖 투정을 다 부리며 겨우 일어났다. 하나 둘씩 오기 시작한 동네 친구들이 다 모이면 행진곡동요나 새마을 노래를 부르며 줄을 맞추어 학교로 갔다.
숙직하신 선생님의 선창으로 국민체조를 하고나서 빗자루 등을 들고 그 날 정해진 곳으로 줄지어 갔다. 언제 잠을 잤냐는 듯이 장난끼 가득한 얼굴들을 하고 재잘거리면서.
 
 청소할 곳은 밤새 밀물이 갯가로 안고 와 놓아둔 쓰레기를 줍는 바닷가였지만 대부분은 동네 안 샘물터였다. 끊이지 않고 솟아나는 샘물을 다 퍼내고 청소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힘이 센 남자 선배들이 어른 흉내를 내며 웃통을 벗고 먼저 나섰다. 땀을 흘리며 옷이 젖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조기청소는 이렇게 하는거라고 강변하듯이 남학생들은 바가지를 들고 빠른 손놀림을 놀렸다.
샘물웅덩이가 거의 바닥을 모일만큼 물을 다 퍼내면 대기하고 있던 빗자루 학생들은 재빨리 샘물가를 싹싹 닦아냈다. 이끼낀 웅덩이의 벽과 바닥을 닦고 물로 행궈 그 물을 다시 퍼내면 샘물청소는 끝이 났다. 구멍 난 까만 돌 사이로 수정같이 맑은 물이 세수를 한 듯이 말간 모습으로 서로 앞다투며 퐁퐁 솟아났다. 설거지를 한 그릇처럼 티 하나 없는 우물에 새 물이 가득차는 걸 바라보며 우리는 일 년에 몇 번만 불을 때는 동사무소 목욕탕에서 때를 밀고 뽀얗게 된 친구의 얼굴을 모는 것처럼 마음이 다 환해졌다. 그렇게 새벽의 짜증은 다 헹구어지고 웃음만 남은 얼굴이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동네 물은 인근에서도 알아주는 맛있는 샘물이었다. 오죽하면 동네이름이 미수동(味水同)일까. 여름엔 이가 시릴만큼 시원하고 겨울이면 찬바람과 진눈깨비들도 무색하게 따뜻한 물이 마르지도 않고 솟아나서 물가는 늘 붐볐다. 사람들은 새벽부터 물허벅을 등에 지고 손에는 빨래바구니와 우영(집울타리의 작은 텃밭)에서 따낸 푸성귀들을 바구니에 담고 세수도 하지 않은 푸석한 얼굴로 모여들었다.
밤새 일어났던 이야기들을 질펀하게 쏟으며 샘물가는 금새 읽기 쉬운 조간신문 되고 누구나 들을 수 있게 스피커가 좋은 라디오 방송국이 되어서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을 활기차게 열어주었다. 어디서나 입담좋은 아낙네가 있기 마련이어서 시끌벅적한 웃음소리가 아침부터 온 동네를 깨웠다. 가끔씩은 얼굴에 멍이 들어 나오는 이웃들이 동네 아줌마들과 함께 남편을 타도하는 것이 되기도 했다.
고행사람들은 모두 같은 호칭을 쓴다. 어린아이들은 어른들을 모두 삼촌이나 이모로 부르고 어른들도 윗사람을 그렇게 부른다. 친척들은 물론 촌수대로 불렀다. 아이의 이름을 붙여 00엄마라는 호칭은 근래에 와서 젊은이들 사이에서 퍼진 일이지만 아직도 삼촌, 이모가 익숙하고 부르기 편하다. 그렇게 부르다 보니 정말 모두가 엄마의 자매같고 아버지의 형제같은 것일까? 한 동네는 그대로 한 집안이 되어서 궂은 일 좋은 일을 모두 제 일처럼 해준다.
심지어 이웃제사도 도와주고 제사상에 올릴 음식으로 빵을 사서 구덕(대나무고 였은 바구니)에 예쁘게 쌓아 제물로 쓰게도 한다. 다른 지방에서는 빵을 상에 올리지 않는다는 것은 훨씬..이 후에 안 일이다. 제사가 끝나면 상에 올렸던 음식들을 구덕에 담아 아침이 되기 전에 동네에 음식을 나누었다. 어떤 집에는 밥과 떡을,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혼자 사는 집엔 국과 함께 고기와 과일까지 한 점씩이라도 다 돌렸다.
 
어릴 적엔 우리집 제사도 기다려지는 날이었지만 남의 집 제삿날도 기다려지는 신나는 행사였다. 너른 앞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크고 좋은 것으로 배를 갈라 말리고 정성스레 구운 선과 새끼 상어로 만든 하얗고 부드러운 산적, 그리고 메밀가루로 만든 빙떡이 나는 제일 좋았다. 빙떡은 콩나물이나 무채를 살짝 데쳐내어 소금과 깨소금만으로 담백하게 양념을 하고, 뒤집어 놓은 솥뚜껑 위에서 얇게 부친 메밀 전병에 얹어 빙그르르 말아 낸 고향 특유의 음식이다. 따뜻할 때 먹어도 좋지만 한 겨울에 차갑게 식은 빙떡을 두 손에 쥐고 한 입 베어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다. 어느 집에 오늘 제사가 있다는 것쯤은 누구나 알게 되어있다. 우물가에서 이미 다 알아 버리는 것이다. 아니, 그게 아니라도 어느 집이나 내 집처럼 드나들다 보니 그 집안의 대소사를 하나도 남김없이 다 꿸 수 밖에. 4월의 어느 날은 몇 집 건너 제사 음식을 장만하는 날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유난히 혼자 사는 이모나 할머니가 많은 동네다.
 
 맛있는 샘물과 함께 만든 음식들이어서인지 애기서는 새댁처럼 자꾸만 우리동네 음식이 그립다. 열심히 우물가를 청소하며 우직한 모습으로 맘 설레게 했던 남학생들과 까닭도 없이 수줍음 많던 친구들은 지금쯤 어디서 무얼할까. 입안이 칼칼하게 마르고 가만히 젖어드는 가슴이 눈을 감게 한다. 꼭 감은 눈 속에 고향이 환하게 다가온다.
 
                                                        09/04 에.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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