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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랑이 고기를 먹다    
글쓴이 : 조헌    12-06-26 11:58    조회 : 4,564
 
호랑이고기를 먹다
<나의 글쓰기>

                                                                         조      헌

 나는 호랑이고기를 먹었다. 간장에 졸인 것을 하얀 쌀밥에 올려 꼭꼭 씹어 먹었던 것이다. 고기의 감칠맛도 일품이었지만 쫄깃쫄깃하게 씹히는 맛이 아주 그만이었다.

 그때가 아마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이었을 거다. 아버지와 함께 양양 낙산사로 여행을 갔다. 절에서 묵은 다음날, 우리는 나이 많은 공양주(供養主)로부터 아침상을 받았다. 상위에는 밥과 함께 몇 가지 반찬들이 정갈히 놓였는데, 그중 유난히 내 입맛에 맞았던 반찬 - 마치 소고기 장조림 같이 짙은 갈색의 짭조름하며 고소했던 그것이 무엇인지 무척 궁금했다. 때마침 들어온 공양주께 여쭈니 “그건 이런 산중에서나 맛볼 수 있는 아주 귀한 호랑이고기란다!” 나는 이 놀랍고 생뚱맞은 답변에 설마 했지만, 공양주의 진지한 표정과 기꺼이 동의하시는 아버지의 웃음소리에 그만 이 말을 철석같이 믿게 되었고, 어리석게도 이 믿음은 내 기억 속에 너무나도 또렷이 남게 되었다.
 살면서 우린 겪고 나면 별 일 아닌 것도, 당시엔 너무 절절하여 애를 쓰는 일이 흔하다. 또 사소하지만 자기만 알고 있어 한층 더 즐겁고 자랑스러운 것, 그래서 두고두고 되새기며 감동하는 일도 있기 마련이다. 더욱이 가끔은 우리가 진실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 실상은 오히려 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음을 나중에야 깨닫고 실소(失笑)를 금치 못하는 일도 더러 있다.
 하지만 어쨌든 그 당시 나에게 호랑이고기를 먹었다는 이 사실은 주체할 수 없는 감격이었고 충격적 진실이었으며 은밀한 사건이었다. 분명 이보다 유쾌하고 극적인 체험은 달리 더 없었다. 따라서 이것은 오래도록 내 마음속에 경이로움이 되어 줄곧 커져갔던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다 표현의 욕구가 있다고 했던가. 그 후, 난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이 특별한 경험을 누구에겐가 말하고 싶어 퍽이나 안달을 했고, 좀 더 실감 있게 전달하고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이 이야기의 사실적 구성을 위해 공을 들였는지 모른다. 그리고 내 얘기를 더 많은 사람들이 흥미 있게 듣고, 또 모두가 사실로 여겨 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머릿속은 언제나 꽉 차있었다. 게다가 가끔씩은 나 자신에게마저 희미해져가는 고기의 맛을 곰곰이 기억해내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소박하지만 강렬한 이 열망은 간단히 식지 않았다. 오로지 남들이 내 말을 믿고 인정케 하고 싶은 욕구는 낙산사를 가게 된 자세한 경위, 정확한 날짜와 시간, 그리고 같이 먹고 동의해 주셨던 아버지의 권위까지 빌려가며 조금씩 더 길게 말을 잇게 하였고, 틈이 날 때마다 이런 것들의 배열을 이리저리 달리하며 쉼 없이 짜 맞춰보곤 하였다. 당시 이 표현에 대한 나의 심취(心醉)는 혼자 골몰히 빠져들 수 있는 흥미진진한 작업이었으며 일종의 구원(救援)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남들이 선뜻 믿고 수긍할 만큼 잘 꾸며진 이야기는 쉽사리 머릿속에 고이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그때 나는 주장만을 위한 강박감에 너무 흥분해 있었고, 관심을 끌기 위해 애써 과장했으며, 반복을 거듭한 장황함으로 갈 길에서 벗어나 너무 에돌지 않았나 싶다. 사실 이렇게 설익고 엉성한 이야기로는 누구도 설득할 수 없음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인 공보다 적은 반응에 늘 애석해 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붉어질 일이다.
 시간이 흐르고, 말과 글을 통해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감동 시킨다는 일이 진정 녹록치 않음을 깨달아 갈 무렵, 얄궂게도 그 어려움 속에 도사리고 있는 진귀한 행복이 나를 찾아왔다. 간단치는 않지만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씨줄과 날줄로 얽어, 나름대로의 무늬를 놓으며 엮어간다는 일이 그 무엇 하고도 바꿀 수 없는 희열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 뒤로 나는 크고 작은, 그리고 아주 소중한 생각과 경험들이 생길 때마다 찰진 이야기로 꾸며보려는 내밀한 조바심을 한껏 즐기곤 했다. 그리고 힘겹지만 촘촘하게 직조(織造)된 갖가지 얘기들을 통해 새로운 의미나 가치, 그리고 정제된 질서들이 만들어 질 때마다 뿌듯한 즐거움과 성취감으로 하얗게 밤을 새울 때도 있었다. 이렇듯 호랑이고기로부터 비롯된 성장기의 글쓰기는 내 사유의 중요한 한 축(軸)이 되어주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호랑이고기는 두부를 들기름에 지져 다시 간장에 바짝 졸여낸 것임을 알았다. 하지만 이미 호랑이 고기의 진위(眞僞)는 나에게 별상관이 없었다. 왜냐하면 처음 들었던 순간의 놀람과 긴장은 아직까지 충분한 감동으로 남아있고, 오히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호랑이고기일거라는 확신은 확고부동하게 내 머릿속에 화석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참 많은 일들을 보고, 듣고, 겪으며 살게 마련이다. 그것들 중에는 진실도 있고, 진실이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도 있다. 아니면 내 스스로 진실이 되게끔 노력하는 것들도 있다. 대체로 사람들은 일일이 따져 확인된 사실만을 신뢰하고 사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 주변에는 어수룩하지만 정말 믿고 싶은 이야기도 있고, 현실하고는 다소 동떨어졌지만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이야기도 얼마든지 있다. 또 솜이불 속 같이 따뜻한 감동이나 생각사록 희한한 놀라움의 사연들도 흔히 있지 않은가. 오히려 이런 이야기들이 바짝 말라 거친 우리네 인생을 윤이 나고 넉넉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닐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이야기들을 힘들여 정리하고 앞뒤 맞게 꾸며, 그 누군가에게 말하고 또 읽히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본다.

 나는 아직도 하고 싶은 말들이 많이 있다. 내가 그토록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뜻한 마음이 배어있는 감동과 슬며시 번지는 착한 눈물에 관한 것이었으면 한다. 칼날 같은 이성이 동강동강 잘라놓은 빤질대는 이야기가 아니고, 작은 씨앗 속에 숨었다가도 정성을 다해 심고 가꾸면 쑥쑥 자라주는 순한 나무들같이, 편안하고 너그러운 이야기여야 한다. 커다란 천둥소리가 아니고 격랑의 파도소리도 아닌, 작은 시냇물소리 내지는 고요한 호수의 잔물결소리 같았으면 좋겠다. 검푸른 바다의 심연이나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을 만큼의 깊은 계곡 같은 이야기는 싫다. 그저 마을로 들어가는 길섶의 하찮은 풀꽃같이 소박한 이웃의 잡다하고 곰살궂은 이야기, 하지만 거기엔 삶의 흔적이 켜켜이 묻어있고 땀 냄새든 입 냄새든 사람의 냄새가 물씬 풍겨, 함께 느끼고 즐기며 정겹게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되길 바란다. 사람들 간에 시고 짜고 쓰고 매운, 그러나 곱씹으면 구수하면서도 은근히 단맛이 우러나는 그런 솔직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퍼낼수록 맑게 솟는 옹달샘처럼 앞으로도 할 얘기가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린 시절 호랑이고기의 맛을 아직도 기억하여 남들에게 이야기 하고 싶은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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