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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한 개털족    
글쓴이 : 조헌    12-06-26 12:00    조회 : 3,931
 
행복한 개털족

                                                                          조     헌

 “자네가 아뭏거나 무섭고 흉한 사람이로세. 자네는 세손(世孫) 다리고 오래 살랴 하기, 내가 오늘 나가 죽게 하얏기 사외로와1), 세손의 휘항2)을 아니 쓰이랴 하는 심술을 알게 하얐다네.”
 이 말은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 속에 갇혀 9일 만에 절명한 비운의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아내인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에게 불만에 가득 차 거침없이 내 뱉은 볼멘소리로 《한중록(閑中錄)》에 기록되어 있다.
 1765년 음력 5월 23일. 이미 대처분을 결심한 영조는 휘령전으로 사도세자를 부른다. 자신의 운명을 감지했는지 세자는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도 화증내는 기색 없이 용포(龍袍)를 달라하여 입으며 “내가 학질을 앓는다 하려하니 세손의 휘항을 가져오라.”고 느닷없는 명을 하자, 그 휘항은 작으니 당신 휘항을 쓰라고 한 아내에게 벼락같이 화를 내며 마지막으로 해 댄 소리다.
 세자가 무슨 생각으로 오뉴월에 아들의 겨울 방한모를 쓰려 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나가면 죽게 될 지도 모르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마지막 청을 한마디로 거절한 아내에게 가졌을 섭섭한 마음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얼마 전만 해도 젊은 시절 일에 쫓겨 이렇다 할 취미도, 노년에 대한 설계와 준비도 없이 퇴직을 맞아 일상생활에서 자립하지 못하고 부인에게 모든 것을 의존하는 남성을 ‘젖은 낙엽족’이라 불렀다. 마치 젖은 낙엽이 빗자루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듯 부인을 졸졸 따라다니며 한사코 붙어 있으려 한다 해서 생긴 말로 평생 일밖에 모르고 성실하게 살아온 남자들을 비아냥대며 하는 소리였다. 어쩌다 가장들의 위상이 예까지 추락 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씁쓸한 뒷맛은 감출 수가 없다.
 더욱이 최근엔 ‘개털족’이라는 신조어도 유행하고 있다. 개털이라는 말이 쓸데없는 일이나 행동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니 당연 그 뜻이 좋을 리야 없겠지만 알고 보니 자식들이 모두 입대(入隊) 또는 결혼 후 분가해서 달랑 부부만 사는 집의 남편을 가리킨다는 거였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계절에 맞춰 김치도 담고 그날그날 특별한 반찬도 곧잘 하던 아내들이 자식들이 떠나 남편과 둘이 되면 우선 음식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삼십년 넘게 해온 일이라 신물도 나겠지만, 그렇다고 속수무책인 남편을 두고 느닷없이 태업을 감행한다니 대체 어쩌란 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래 평소엔 잘 얻어먹지도 못하다가 아이들이 휴가를 나오거나 집엘 찾아와야만 겨우 아내의 음식 맛을 보게 된다는 남편들이 일명 개털족이다.

 사내아이만 둘인 내가 개털족으로 전락한 것은 서너 달 전이다. 두 애가 몇 달 간격으로 입대하자 졸지에 찾아든 불행이었다. 남들도 겪는 일이거니 싶어 앞으로 2년 남짓 각오는 했지만 아무래도 이건 아니다 싶은 일이 너무 자주 벌어졌다.
 퇴근하여 집에 오면, 있는 반찬에 찬밥이나 끓여먹자고 하질 않나 간혹 라면도 별미라며 아양을 떨기도 한다. 더욱이 음식을 해 놔도 없어지질 않으니 돈만 들지 도무지 신이 나지 않는다고 맛집 순례를 강요하기도 한다. 어디서 그렇게 많이 들어 알고 있는지 고기는 어느 집이 맛있고, 생선은 어디가 좋더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하고, 한술 더 떠 꼭 끼니마다 밥을 찾는 당신의 나쁜 습관을 이제는 고쳐야 한다며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안주와 와인 몇 잔으로 우아하게 저녁을 때우는 것이 어떠냐고 호들갑이다.
 번번이 거절하기도 성가신 일이고 이날 입때껏 가족을 챙겼던 노고가 가상해 어영부영 쫒다보니 이젠 한도 끝도 없다.

 그러던 지난주였다. 군에 있는 아이들이 동시에 외박을 나올 거라는 연락을 받고 뛸 듯이 기뻐하던 아내는 일주일이나 남았는데도 그날부터 부산하기 짝이 없었다. 큰 아이가 좋아한다고 포기김치를 담더니 작은 애 때문에 오이소박이도 조금 해야겠다고 수선을 떨었다. 첫날은 갈비찜을 해 먹이고 다음 날은 고기를 굽는 게 좋겠다며 일등급 한우 등심은 당신이 준비해 달라고 종주먹을 댔다.
 드디어 애들이 온다는 토요일 아침! 내 식사는 뒷전인 채, 아내는 식탁에 잔뜩 벌려놓고 유부초밥을 만들고 있었다. 자식들을 위해 신이 나 음식을 만드는 아내의 모습이 밉기까지야 하겠냐마는 왠지 모를 서운함이 슬슬 일기 시작했다. 더욱이 잠자코 신문을 읽던 나에게 싸다가 터진 거라며 못난 초밥 몇 덩이를 덜렁 갖다 놓을 때는 어이가 없었다. 개털족의 설움이 실감되며 얼굴에 열이 오르고 부아가 울컥 치밀었다.
 나는 왜 이 순간 남자가 나이를 먹으면 속이 좁아진다는 말과 함께 뜬금없이 사도세자의 원망이 떠올랐는지 다시 생각해봐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아이들이 집에 있는 동안 나는 잠시나마 내 신세를 잊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입에 맞는 음식을 포식할 수 있어 나름 행복했다.

 그런데 애들이 모두 귀대한 날 밤이었다. 낮부터 으슬으슬 춥더니 오후가 되면서 신열이 나고 온몸이 매 맞은 듯 쑤셔댔다. 저녁도 먹지 못하고 자리에 누워 끙끙 앓기 시작했다.
 마침 신종 인플루엔자로 세상이 떠들썩하던 때라 아내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집에 있는 해열제를 찾아 먹이고 따뜻한 물을 계속 끊여대더니 그래도 좀처럼 열이 내리지 않자 응급실을 가자고 재촉했다. 사람들로 붐비는 응급실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법석을 떤 아내 덕에 겨우 해열제 주사를 맞고 집으로 돌아왔다. 열이 좀 내리자 나는 혼절한 듯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쯤이나 잤을까 아내가 체온계를 보기위해 실내등을 켰다. 그 서슬에 깬 내가 보니 아내는 지금껏 자지 않고 내 곁을 지켰던 모양이다. 찬 수건을 이마에 올려놓자 정신이 들었다.
 “이젠 당신도 늙었나 봐요. 이제껏 감기몸살을 모르고 살더니 무슨 일로 이렇게 심하게 앓는지.” 뿌연 불빛 속 아내의 얼굴도 세월의 더께로 예전 같지 않았다. 
 다시 이마에 수건을 갈아주며 “당신이 빨리 나야 신사동 한번 갈 텐데. 거기 가면 추어탕 기가 막히게 잘하는 집이 있대요. 당신 요즘 잘 못 먹어서 탈이 난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나는 그만 웃음이 툭 터지며 ‘자네가 아뭏거나 무섭고 흉한 사람이로세.’라는 말이 언뜻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개털족이다. 그러나 분명 행복한 개털족이다. 밤새 나를 위해 간호해 주는 아내, 그리고 추탕집에 가자면 좋아 앞장 설 아내가 옆에 있어 행복하다. 몸이 다 나면 내가 먼저 서둘러 아내와 추탕집엘 가야겠다. 걸쭉한 추탕 맛이 더없이 구수할 것이다.

1) 꺼려하여, 꺼림칙하게 생각하여

2) 揮項 : 머리에 쓰는 방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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