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엄마의 눈물
조 헌
두시 정각. 한참동안을 우렁차게 울려 퍼지던 군가 소리가 갑자기 뚝 그치고, 2단으로 된 대형 스피커에서는 크고 엄격한 목소리의 안내방송이 흘러 나왔다.
“지금부터 입대 장정들은 소지물품을 챙겨 즉시 연병장에 집합하기 바랍니다.” 일순 소란스럽던 사방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지더니, 방송이 한 번 더 반복해 들리고 나서야 바쁜 몸동작과 함께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가족들 사이에 둘러 싸여 초초히 입대시간을 기다리던 장정들은 급히 각자의 물건들을 챙겨들며 잔뜩 겁먹은 눈으로 연병장 쪽을 연신 넘겨다보았다.
아까부터 계속되던 제 어미의 걱정스러운 잔소리를 건성으로 듣고 있던 아들 녀석이 나를 쳐다봤다. 나는 들고 있던 아이의 배낭을 말없이 들어보였다. 천천히 다가온 아들의 야윈 등에 그것을 메어 주며 “몸조심해야 돼! 무엇보다도 그게 젤 중요한 것 알지? 너는 무슨 일이든 잘 해 낼 거야! 아빠는 너를 꼭 믿는다!” 잠시 아들을 끌어안자 눈이 뿌옇게 흐려지며 목이 꽉 메었다. 그런 나를 애써 외면한 채, 아들애는 두어 걸음 물러서서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따가운 햇볕이 내려 쪼이는 연병장을 향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 나갔다. 그러자 지금까지 잘 참아주던 아내가 갑자기 아이를 쫓아 뛰기 시작했다. 곧이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에서 아이를 혹시 놓칠세라 동동거리며, 연병장까지 뛰쳐나온 수많은 사람들 사이로 아내의 모습은 뒤섞여 들어가 찾을 수가 없었다. 이리 저리 몰리며 까치발을 하고 목을 길게 뺀 채, 자식의 얼굴을 한 번 더 보려고 두리번거리는 모정(母情)의 안타까운 눈빛들이 정말 눈물겨웠다.
전시(戰時)도 아닐 뿐더러 누구나 다 갔다 오는 곳인데 뭘 그리 조바심을 내냐고, 징징대는 아내를 나무라면서 덤덤히 따라왔건만 막상 훈련소로 들여보내기 위해 헤어져야 하는 순간, 이렇게 가슴이 저릴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 내가 입대할 때보다도 훨씬 더 아프게 가슴을 훑어 내었다.
30년도 더 된 일이다. 내가 군에 입대하던 날 아침, 안방에 밥상을 차려놓은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하얀 쌀밥 그리고 소고기 무국, 생선까지 구워 잘 차려진 밥상에 식구들이 둘러앉아 한참을 기다렸지만 어머니는 끝내 식사를 못하신 채, 집 뒤꼍 구석에 쪼그려 앉아 신음 같은 울음소리를 내고 계셨다.
“역에 가서 안 운다고 약속을 하면 모를까 아니면 집에 계시는 게 좋겠어요. 모시고 가면 틀림없이 울고불고하실 텐데 어머니의 그런 모습을 보고 떠나면 저 얘 마음이 어떻겠어요. 그러니까 그냥 여기서 인사하고 보내세요. 내가 잘 바래다주고 올 테니까요.” 누구보다도 먼저 채비를 하고 따라나선 어머니에게 형은 잘라 말했고 다른 식구들도 모두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자, 고개를 가로저으면서도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그만 문 앞에 주저앉고 말았다.
찹찹한 마음으로 집 앞 골목을 빠져나오며 어머니가 궁금해진 나는 흘낏 뒤를 돌아보았다. 발까지 구르며 집 앞 담벼락에 얼굴을 기댄 채 어머니는 울고 서 계셨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어깨까지 들썩이던 그 모습을 나는 군대생활 내내 한 번도 잊어 본적이 없다. 신병훈련소에서 고된 일정으로 힘들고 지칠 때마다, 그리고 자대에 배치 받아 밤늦도록 근무를 하거나 야간보초를 설 때에도 내가 애처로워 안타까워하시던 어머니의 그 모습을 떠올리면서 ‘무엇보다도 잘 견디고 건강하게 제대해야지!’하는 다짐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힘겨운 일도 어렵지 않게 끝낼 수가 있었고, 밀려오던 두려움도 금방 가셔져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끼곤 했다.
“오빠가 제대할 때까지 삼년 동안을 꼬박 엄마는 찬밥을 잡수며 지낸 걸 알아!” 제대하고도 한참이 지난 후, 우연히 누이동생에게서 들은 이야기였다. 입대한 다음 날부터 어머니는 매 끼니마다 내 밥주발에 밥을 퍼 담아 부뚜막에 놓았다가는 다음 끼니때 그 찬 것을 드셨다고 한다. 집 떠난 자식 배 골면 안 된다며 삼년을 하루같이 정성을 다해 내 밥그릇을 채우셨던 어머니의 그 애틋한 심정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세상에 영 못할 짓이 사람 기다리는 일이지!” 무턱대고 시간이 가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는 어머니는 아직도 그 때를 생각하면 가슴에 멍울이 선다며 진저리를 치셨다.
아들의 입소식은 생각보다 금방 끝났다. 인원파악을 마치자 대대장은 간단히 환영사를 했고, 곧이어 빨간 모자를 쓴 조교들이 나타나, 어쩔 줄 몰라 허둥대는 아이들을 인솔해 가버리자 텅 빈 연병장에는 오후의 햇볕만이 하얗게 내려깔렸다. 곧이어 부모들에게 내무반을 비롯한 몇몇 시설을 둘러보게 하는 것으로 입소식 행사는 끝이 났다. 30년이 지나도 별로 나아진 것 같지 않은 내무반, 식당, 그리고 샤워실의 모습. 아까부터 무엇을 보든지 눈물을 찍어대던 아내와 나는 그만 맥이 풀려 대강 보고는 막사를 빠져 나왔다. 이제 아들을 이곳에 남겨 둔 채 부대를 떠나야 할 시간이다. 부대 문을 빠져 나올 때, 아내는 다시 한 번 심하게 오열했다. 학창시절 수학여행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품에서 단 한 번도 놓아 본 적이 없었던지라 이렇듯 못견뎌하는 아내의 심정을 나는 충분히 이해하고 싶었다. 또 이번 기회에 둥지 속에 끼고 있던 자식을 언젠가는 오늘처럼 날려 보내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아 주기 바라면서 아내의 어깨를 도닥거렸다. 나아가 부모도 아이들의 성장과 함께 역할을 새롭게 변화시켜야 하는 거라고 서로 위로하며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아들의 빈방을 쳐다보자 참았던 애절함이 다시금 북받쳤다. 하필이면 때를 맞춰 밖에는 비가 쏟아지는데 낯선 곳에서의 첫 밤을 지내고 있을 아들 녀석의 생각에 다시 한 번 가슴이 휑하니 뚫려버렸다. 아내는 안방으로 들어가 그만 자리에 눕고 나는 아들 방에서 망연히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
여러 날을 풀이 죽어 지내던 아내에게 힘든 고비는 한차례 더 찾아왔다. 한 열흘쯤 지났을까 아들이 입대할 때 입고 갔던 옷이 소포로 도착했다. 때와 땀에 쩐 옷과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신발을 구석구석 살피던 아내는 또 한 번 목을 놓아 우는 거였다. 그리고 하루 종일 그 옷을 빨면서 울기를 거듭하는 아내의 모습에서 나는 문득 30년 전 내 어머니의 모습이 그대로 겹쳐 있는 것을 보았다. 더욱이 그 겹쳐진 곳에선 자식을 염려함에 있어 한 치도 다르지 않을 두 엄마의 눈물이 아프게 배어나왔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 땅의 엄마들은 아들을 군대 보내며 대를 이어 이렇듯 가슴을 찢어내야 하는지 정말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때 이른 장맛비에 아침부터 속을 끓이던 아내. 당분간 그녀의 시계바늘은 마치 멈춰 선 듯 천천히 정말 천천히 돌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