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에서 온 편지
조 헌
가을 산을 오른다. 계곡을 따라 산죽과 억새를 더위잡으며 가파른 산등성이에 서니, 온갖 물감이 범벅이 된 듯 형형색색 현란한 능선 길이 정상을 향해 길게 이어져 있다. 봄의 연둣빛 어린잎은 여름내 짙푸름을 자랑하더니 어느덧 고운 빛깔의 낙엽이 되어 홋홋한 떠남을 준비하고 있다. 태어나 머물다 변하고 사라지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의 준엄한 이치는 여기에도 있는 것인지 이때쯤 산은 눈에 띄게 수척해진다.
계절 탓인가? 소슬한 바람에 날려 분분히 흩어지는 낙엽을 보니, 홀로 하는 산행이 더욱 수수롭고, 무상(無常)한 인생의 자잘한 상념이 머릿속에 잔뜩 똬리를 튼다.
오래 전에 들은 이야기다. 하루는 어떤 사람에게 저승사자가 찾아와 죽음의 길을 재촉하더란다. 당황한 그는 “하늘에 사는 이들은 경우도 밝다던데, 이렇게 느닷없이 가자면 어쩌란 말이오! 다만 며칠 전이라도 미리 일러 주었더라면 사람들과 작별인사도 나누고, 너절하게 벌려 놓은 일도 말끔히 정리하여 홀가분하게 따라 나설 것이 아니요.”라고 항의를 하자, 저승사자는 “몇 년째 하루도 빠짐없이 보낸 편지를 못 받았단 말이오? 벌써 오래전부터 당신 얼굴의 주름으로, 또 점점 쇠약해지는 기력을 통해 낱낱이 알려 주었건만 어찌 그걸 깨닫지 못했단 말이오.”하고 오히려 핀잔을 주더란다.
무진장 살 것이라는 어이없는 생각으로, 한껏 마련이 많은 인간의 탐욕과 집착에 일침을 가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건강한 사람이라도 대개 사십대 중반을 넘기면 주름과 함께 노안(老眼)이 찾아오고, 쉰이 넘으면 전만 같지 못한 기력으로 힘들어지기 마련이다. 하물며 육칠십 대를 말해 무엇 하랴? 하지만 이렇듯 따뜻한 물에 얼음 녹듯 풀리는 기력을 느끼면서도 끝내 우리는 생멸(生滅)의 이치를 모르고 사는 것이다. 알기는커녕 한술 더 떠, 백년 인생이 천년의 걱정으로 야단을 피우고, 여기저기 헬스클럽이나 건강원 그리고 성형외과를 기웃거리며 법석을 떨기도 한다. 아예 저승의 편지를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인간은 너나없이 건강하고 오래 살기를 바란다. 그래서 자기만은 죽음이 비껴갈 것이라 믿으며 애써 딴청을 부리기 일쑤이다. 하지만 인생이란 생로병사의 거친 파도를 타고 와, 잠시 머물다 이슬처럼 사라지고 마는 안타까운 것임을 어찌하랴. 다만 사람에 따라 조금 길게 사는 이가 있는가 하면, 아쉽게 일찍 생을 놓는 이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죽음이란 인간이 아무리 시치미를 떼고 어정쩡히 외면해 봐야 그 그늘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다.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죽음! 그러나 우리는 그 허무의 중간쯤에 살고 있으면서도, 항상 죽음을 살피면서 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저 바쁜 일상 속을 북적대며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지인(知人)의 부음(訃音)을 듣고서야 허둥지둥 자신의 삶을 되짚어보며 비로소 가슴 휑한 허무를 감당하게 된다.
황망히 문상을 마치고 상청(喪廳) 가운데 덩그러니 걸려 있는 망자의 영정을 쳐다보면, 평소 가득 찬 득의(得意)와 오만(傲慢)은 사라지고 스스로 무너져 가라앉는 깊은 겸허를 배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종내 저 한 장의 사진으로 남을 때까지 온갖 신산(辛酸)과 파란(波瀾) 속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탐욕에 울고 집착으로 괴로워할까를 생각하며, 비로소 내 자신의 죽음과 마주 서보는 것이다. 그러면 거기엔 더 이상 커질 수 없는 욕망의 청맹과니가 버둥거리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무엇이든 움켜쥐고 놓지 못하는 탐욕과 집착의 동물이다. 그래서 유독 인간의 죽음이 다른 동물에 비해 처절해 보이는 것은 아닌지 마음 무겁게 생각해 볼 일이다.
돌이켜보면 인간은 자기에게 주어진 몫만큼의 삶을 살 뿐이다. 주어진 그 몫은 욕심을 부려도 더 자라지 않거니와 욕심을 버린다고 해서 줄어들지도 않는다. 이 말은 이미 태어날 때 누구나 엇비슷한 무게의 짐을 지고 살아가야한다는 말일 것이다. 따라서 쓸데없는 탐욕으로 자신의 삶을 구렁텅이로 내 몰지 말아야하며, 끈질긴 집착으로 자신과 남에게 상처를 입히지도 말아야한다. 그리고 한해 두해 나이가 들면서 더한층 겸손해 져야 하고 흘러가는 시간 속에 버려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도 담백하게 선택할 줄 알아야한다. 또 부디 헛된 욕망에 눈멀지 않고 내 능력 밖의 일을 가지고 애써 부대끼지도 말아야 할일이다.
그래서 불가(佛家)에는 <스스로 지닌 것을 놓으라.>는 가르침이 있는 것은 아닌지! 이 가르침이야 말로 우리를 옥죄고 있는 탐욕과 집착을 버리라는 말일게다. 불필요한 것을 버리고 맑게 비워진 텅 빈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인생이 얼마나 여유 있고 정갈해 질까?
물론 미혹이 난무하는 부박한 세상에서 버리는 것의 어려움을 어찌 모르겠는가. 하지만 스스로 만들어 놓은 그물에 걸려 허우적대는 것이 현대인의 자화상이라 한다면, 온갖 욕심의 껍데기를 벗어버리면 삶이란 그리 복잡할 것도 어려울 것도 없을 듯싶다.
어느 스님은 볼일이 있어 산문(山門)을 나설 때마다 “이 절과 내가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떠난다고 한다. 그래야 절을 산에 그대로 놓고 나설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네는 수없이 집을 나서면서도 그 집을 어깨에 잔뜩 짊어지고 나다니는 것은 아닌지. 탐욕과 집착의 끈을 훌훌 놓지 못하는 한, 그 많은 것들을 다 짊어지고 힘겹게 다니는 꼴이 되고 마는 것이다.
모든 것을 스스로 내려놓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처럼 나도 언젠가는 이승을 떠나야한다는 이 자연스러운 순리가 어쩌면 온갖 탐욕과 집착의 끈을 놓게 하여 그나마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만약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 끔찍한 욕심을 다 어떻게 할지 상상도 할 수 없다. 가끔이지만 타인의 죽음을 보며 온갖 것이 다 부질없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기 때문에 그나마 우리들의 삶이 이 정도로 유지되는 것은 아닐까?
다시 거울 속에 비친 내 주름진 얼굴을 보며 저승의 편지를 꼼꼼히 읽어본다. 그리고 주머니가 없어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는 수의(壽衣)를 생각하며 내가 지금 지니고 있는 것이 얼마나 분에 넘치는 지를 곰곰이 살펴본다. 있는 것을 없애지는 못할망정 없는 것을 새롭게 만들지 않아야한다고 새삼 다짐하면서 말이다.
짙어 가는 가을, 한나절을 걸어 내려온 고단한 산길을 되돌아본다.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온 산을 물들이는 오색 창연한 낙엽들!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한 자연의 숨 가쁜 행보에서 적멸의 즐거움(寂滅爲樂)을 본다. 버림의 의식이 저렇듯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인지....... 무심히 떨어지는 낙엽, 그리고 낙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