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의 지겨움
회색비 내린다. 빗방울이 투명하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장맛비 내리는 날은 천지가 무겁고 암울하기만 하다. 억수로 비가 쏟아지는 날이면 온 세상이 잿빛으로 변한다. 노란 루드베키아도, 보랏빛 비비추도, 근심을 잊게 해준다는 저 원추리도 모다 제 색깔을 잃고 만다. 적당한 빗물은 활기를 주지만 너무 긴 장마는 젖히고 젖혀도 다시 쳐지는 장막과도 같다. 건기니 우기니 삼복의 열기(熱氣)니 하는 것도 피할 수 없는 계절의 흐름일 게 분명하다. 봄날의 우수(雨水)는 낭만을 말하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여름장마는 부패와 한숨만 던져줄 뿐이다. 잔병에 효자 없다던가. 자연재해가 비록 하늘의 뜻이라고는 하나 기껏 가꾼 삶의 터전을 부수는 그 무정함은 인간의 영혼을 살짝 맛이 가게 만들고야 만다. 긴 수마 밑에 대지의 활력은 보이질 않는다. 눈에 비치는 모든 풍경의 살집은 바니타스(vanitas)정물처럼 축축 늘어지고 마르며 떨어지고 뒤틀어진다. 열매도 맺어보지 못하고 뿌리째 타락하는 모습이다.
창살처럼 단단한 비, 모서리도 테두리도 없는 소리의 스케치, 웃음의 형태를 잃은 사람들. 이 여름은 비와 함께 와서 비와 함께 떠나갔다. 남편은 내게 왜 에어컨을 건드렸느냐며 역정을 냈고 나는 “다시 켜면 되지!” 하고 쏘아붙였다. “하느님께서 맥주를 너무 마셨나 봐요.” 라고 농을 건네는 손님이 아니었던들, 그 불쾌하고도 혹독한 끈적임 속에서 필시 이성을 잃고 뛰쳐나가고 말았을 것이다. 대책 없이 장마가 시작되는 계절이면 난 늘 뼛속 저 밑바닥에서 역마살이 도지는 소릴 듣게 된다. 자, 이제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까.
간밤엔 아무도 없었다. 남편은 화성(華城)에 가 있고, 큰 애는 친구 집에, 작은 애는 동해로 캠핑을 떠났더랬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 우연히 나는 처음으로 혼자가 되었다. 휑한 공간에 적막과 함께 남는다는 것은 도화지를 펼치고 밑그림을 그리는 일과 같은 것. 가령 장맛비 쏟아지는 이 밤의 뉴스는 커피 한 잔과 냉동 블루베리 몇 알, 빌리 홀리데이의 음성에 취하기에 더 없이 참담하다.
별만 보이던 시절에 나는 떠나왔다. 슬레이트 지붕으로 와당거리는 빗소릴 견디지 못해 문을 열어젖히고야 말았다. 동생은 그 작은 손으로 내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제발 가지 말라고 애원하며 통곡하는 여동생을, 치맛단을 꼭 움켜쥐고 놓지 않는 그 손을 잡아떼며 매정하게 돌아섰다. “조금만, 조금만 참고 있어. 언니가 서울 가서 돈 많이 벌어올게.” 제발 조금만 기다려 달라며, 우는 동생을 뿌리치곤 달렸다.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아.’ 팔월의 장맛비는 꽉 다문 청춘의 봉오리를 흠씬 적시기에 충분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빗속으로 스며들었다. 골목을 빠져나와 직행버스터미널로 향했다. 뒷좌석에 앉아 빗물이 때리는 차창의 내피를 닦으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
스무 해 키워준 거리의 모습을 눈을 씻고 내다본들 무엇 하랴. 반고체 상태의 지방질,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란 풍경은 전부 돼지비계에서 짜낸 쇼트닝 기름처럼 빗속으로 녹아들고 있었다. 시동이 걸리고 버스가 도로를 질주하면서 아이의 울음소리도, 지붕 뚫린 옛집, 유년의 쇠창살도 죄 장맛비에 씻겨 둥둥 떠내려갔다. 전조등이 회색도시를 유인하면 도시는 그 불빛에 유린당하고 만다. 조용하지만은 않은 권태를 희석하려고 난 젖은 도화지 접는 일을 감행했던 걸까.
함석과 석면으로 누덕누덕 기운 지붕, 그 지붕을 꼿꼿하게 내리치던 빗줄기를 잊을 수가 없다. 1986년 여름의 장마는 너무 길었고 나는 참을 수 없었다. 설명의 방식이 따로 있을까. 참을 수 없었던 이유를 어떻게 납득시켜야 하나. 태양이 눈부셔 방아쇠를 당기고 말았다는 뫼르소의 심경에 동의할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이 여름 석 달 열흘 내내 내리던 장맛비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삶은 굳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방인」에 나오는 뫼르소의 방식처럼, 삶의 형태란 때론 언어적 방편으로도 구체화하기 힘들다. 그러니 그것은 절대로, 단연코 한 사람의 죄만은 아니었음을 알아야 한다.
빗소리의 지겨움이라니! 정말이지 그 폭우만 아니었어도 난 솜털처럼 사랑스런 여동생을 놔두고 집을 나오진 않았을 것이다. 그토록 길게 쏟아 붓던 여름비가 아니었던들, 단 하루만이라도 빗물이 구멍 난 지붕을 비켜갔던들, 나는 그 가녀린 것을 내팽개치지 않았을 것이며 그 애도 제 언닐 그토록 원망하진 않았을 것이다. 비 내리는 풍경은 아름답지 못했다. 뫼르소의 헛웃음에 맞장구를 치며 “내가 너를 버린 이유”는 순전히 팔월의 장마 때문이라고, 보꾹을 뚫고 내 이마를 강타하던 그 망할 놈의 빗방울 때문이었다고 발뺌할 작정이다.
하늘은 없었다. 땅 끝에서 땅 끝으로 쏟아지는 빗줄기. 공중으로 물살을 들어 올리는 폭포. 회백색의 사기접시가 타일바닥에 떨어져 사방으로 터져나가듯 으르렁대는 물, 물, 물. 물줄기를 역행하는 연어 이야기. 급류와 폭포를 오르려 온몸을 퍼덕이는 물고기의 여정을 보며 우리는 ‘위대함과 경건’에 대해 얘기한다.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그들 중 단 십 퍼센트 정도만이 살아남아 모천(母川)으로 돌아간다고 해요. 얼마나 처절해요? 제 삶의 방식으로 돌아와 그렇게 산란을 마치고 죽은 연어를 좀 봐요. 그들의 몸은 그래서 핏빛인가 봅니다. -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삽시간에 회색빛 물기둥 속에 파묻혀버렸다. 언제 끝날지 예측할 수 없었던 우기, 쏟아지는 잿빛 하늘을 본 이후 내 눈은 한동안 색을 판별하는 법조차 잊었다. 구름이 걷히자 대지는 복구된다. 흰 듯 검은 듯 장마가 휩쓸고 간 풍경의 선들이 해골처럼 나타나기 시작한다. 접었던 회색의 도화지를 긁어내니 비로소 하늘색이다.
이 계절이 지나면 내년, 후년, 그 다음 해에 또다시 우기는 찾아올 것이다. 신(神)들은 더 많은 축제를 열 것이고 비는 더 호되게 뿌려질 것이며 더 자잘한 일상이 부서질지 모른다. 나는 세상에 없는 빗물. 이토록 번잡한 물감. 어쩜 이것도 하나의 예술일지 몰라. 나 태어난 물로 다시 헤엄쳐가는 길. 그래서 물길은 난폭한가 보다. 굳이 따지려 들지 마시라. 당신과 나, 우린 모두가 상처투성이 생물. 뫼르소에게 태양빛은 너무 눈부셨고 빗소리는 당신에게 너무 지겹지는 않던가.
-한국산문 2011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