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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와 아들인 나    
글쓴이 : 문영휘    12-07-14 11:35    조회 : 3,985
아버지와 아들인 나
                                                                        문  영  휘
  세상에는 부모 잃고 춤추는 아들도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출세를 하고 갖출 것 다 갖추어도 부모 위해 할일 다하지 못하고
끝내 이별할 때는 슬퍼하는 것이 상례다. 100수에 가까운 고령으로 별세하게 되면 그 아들
딸들은 호상(好喪)이라며 춤을 추기도 한다. 반대로 오늘의 각박한 세상에 부모 재산을 탐하
여 부모가 일찍 죽기를 바라는 이는 부모가 별세하면 마음속 방울 소리를 내며 무당춤을 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저것도 아니고 부모를 일찍 여위고 보니 항상 마음이 저미고 있다.
 
  지난날 어머님은 언제나 나의 손을 떼어놓지 않고 돌보시다 내가 9살 초등학교 3학년 해
방이 되던 해 몹쓸 병으로 별세했고, 아버님은 일생동안 불의(不義)를 모르고 가족 위한 농
사일에 손발이 불어터지고 갈라지도록 고생하시다 유명을 달리 하였으니 객지생활에서 임종
마저 하지 못한 나는 한이 맺혔다. 연세가 들어 쇠약해지면서 아버지는 항상 바르게 살아야
하는데 하시다가 별세하실 즈음에는 할아버지가 73세에 별세했고 공자도 73세에 유명을 달
리 하였으니 난들 73세를 넘기겠나 하시더니 결국 그해 가을 9월19일에 위궤양이란 지병으
로 별세하셨다. 그때 아들인 나는 27세, 학교를 마치고 군에 다녀와서 겨우 직장을 구한 직
후였다. 나보다 3세 더 어린 여동생 결혼도 시키지 못하고 고생과 걱정만 하시다가 별세하
셨다.
  더욱 잊혀지지 않은 것은 한일 병탄(倂呑) 후 친일파 박작댁(朴爵宅: 본명 박중양(朴重陽)은 왜
놈으로부터 작위호칭을 받은 직후 2-3차례에 걸쳐 할아버지를 찾아와 서울에 가서 함께 정
치를 하자고 권하였으나 수긍을 하지 않고 농사에 전념하였다는 할아버지의 뜻을 전하고 아
버지도 해방직후 일본인들이 관리하던 적산농지 재분배 시 로비청탁까지 거역하고 소작인
실익을 위해서 사(私)를 버리고 논과 밭 과수원 등 고른 배분에 헌신하시던 이야기는 지금
도 생생하다. 노령의 아버지는 나를 두고 고등학교 2년 재학시절부터 장가를 보내야겠다고
서둘러 친지 분들께 소개하라 하시던 생각은 끝내 이루지 못하고 별세하셨으니 나의 마음은
아렸다. 아들에 대한 기대는 큰 벼슬을 하라는 것도 아니고 부자가 되라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결혼을 시키고 편히 잠들고자 하신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후 33세가 되도록 결혼마저 못한 체 홀로 외로운 신세가 되고 보니 이젠 이웃사
람까지 걱정을 하였다. 뒷집 선배님은 나를 앞에 두고 자네는 무엇 때문에 결혼을 못하느냐,
하더니 머뭇거리는 나를 보고 거침없이 자네는 정녕‘성 불구자 고자지’ 하며 다붙일 때
정신이 반짝 들었다. 하기야 요즈음은 40세가 넘어도 결혼을 하지 않는 남녀들이 많다고들
하지만 그때는 30세만 넘어도 노총각 취급을 받을 때였다. 그러나 뜻밖에 성 불구자란 말의
소문이 잘못 퍼질까하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어디에 가도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결혼만
이 아니다. 나는 아버님께 하나도 말씀 들어드린 것이 없었다. 주자 십회훈(十悔訓)에 불효
부모사후회(不孝父母死後悔), 즉 부모에게 효행하지 못하면 죽은 후에 뉘우친다는 말이 있다.
나 같은 사람을 두고 한 말인 것 같았다.
 
 
  이럴 즈음에 서둘러 결혼 중매에 나선 사람은 나의 제매(弟妹)였다.
  고교 교사였던 그는 어느 날 가정방문을 가서 본 규수(閨秀)에 관심이 갔다. 학부모에게
누구냐고 물었을 때 그 집 맏딸의 친구인데 좋은 신랑감을 소개하라며 그 처녀의 소개를 자
세히 했다고 한다.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하여 중 고교 교사로 있다는 이야기에 어울릴 것
으로 여겨 나에게 권한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나는 한 가뭄에 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사귀어 보기로 했다. 약속한 날  대구 보리수 다방에서 양가 어른분과 같이 만났다. 처음 만
난 그이는 호감이 가고, 함께 직장생활을 하면 어려웠던 생활에 도움도 될 것으로 여겨 홀
로 김칫국 마시는 기분으로 1년여 친교생활을 거쳐 혼례식을 올렸다.
 
  그러나 농촌출신 신랑과 도시출신 신부와의 사이는 생활문화의 차이로 쉽게 달콤한 꿈을
오래도록 지속하기가 어려웠다. 생활양식과 풍속이 다르니 사고방식도 달랐다. 그러나 직장
으로 인해 서울과 대구에 서로 떨어져 살면서 일거리에 묻히고 태어난 자녀 뒷바라지와 교
육에 전념한 체 어쩔 수 없이 뜻을 맞추어 가며 2남 1녀를 두고 가정을 이루어 온지 벌서
40여 년이 훌쩍 지나 늙은이가 되었다. 이제는 나의 의욕도 희망도 강도(强度)를 줄여 절제
하며 살아갈 뿐이다. 게다가 하늘에 계신 부모님 아래서 못 다한 일을 해야한다는 의무감으
로 이제는 열심히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뿐이다. 그러나 나에게 되돌릴 수 없는 허전한
마음은 아버지께 사죄하면서 불러보아도, 손자 손녀까지 두고 잘 살고 있다고 사뢰기도 하
며, 따뜻이 보살펴 달라고 머리 숙여 기도를 해도 말없는 아버지!
 
  그래도 원망도 질책도 하지 않고 고이 침묵 속에서 선(線)도 소리도 없이 전해주는 영
(靈)의 가르침으로 나를 일깨워 주고 있으니 그것은 이웃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후회하
는 일없도록 하라는 것이다. 게다가 L. N. 톨스토이를 일러주었다. 이분은 한때 고향으로 돌
아가 지주로서 영내 농민의 생활개선을 위한 농민운동을 하여 성공하지는 못하였으나 ‘인
간의 본질을 신과 같은 아름다운 존재로 보면서 복음서 안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생
활’을 한 것같이 나에게도 그분의 뜻을 찾아 학문으로 새 생활을 찾아보라는 것이다.
  
  이것은 부모의 뜻을 이어보지도 헤아리지도 못한 나에게는 하나의 숙제가 되었다. 그것은
바로 효 학의 문제다. 효는 부모와 자녀사이의 징검다리라고도 할 수 있어서 어느 가정이나
부모와 자녀사이에는 효가 있어 생활의 도(道)를 가르치고 있으니 가족의 행복을 위한 우리
의 효를 전파하여 효인 들의 힘으로 만인들의 생활 속에 보탬을 주고 사회발전에 기여하라
는 소리 없는 일을 맡긴 것이다. 그래서 마음에 와 닫는 《우리의 효》를 통해서 진정 이웃
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해 보고싶다는 나의 작은 희망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아들의 작은
행복 찾기가 아닌가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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