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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팥 칼국수    
글쓴이 : 조헌    12-08-31 12:38    조회 : 4,448
 
팥 칼국수

                                                                         조     헌

 이른 봄 아침햇살은 용화산(龍華山) 정상을 환하게 비추며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왔다. 산 남쪽으로 펼쳐진 익산 미륵사지(彌勒寺址)의 넓은 뜰은 봄기운이 완연했고 동서로 나뉜 연못엔 미풍으로 찰랑대는 물결이 쉼 없이 조잘댔다.
 훌륭한 절터의 지세는 늘 안온하다. 미륵사지도 주산(主山)은 비록 힘차고 당당하지만 완만히 흘러내린 산줄기가 둘로 갈리며 삼태기 안 같이 절터를 품고 있어 연꽃 속처럼 편안해 보였다. 더욱이 몇 해 전 유물전시관을 짓느라 어수선했던 모습을 기억하는 나에겐 깔끔하게 정비된 모습이 아주 상큼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보고자 했던 서탑(西塔:국보 제11호)은 해체보수 중이라 가건물 속에 갇혀있고, 그나마 얼마 전에 복원된 미끈한 동탑(東塔)이 화강석 하얀 속살을 뽐내며 멀다않고 찾아간 수고에 보답하고 있었다.

 묵은 절터는 해가 질 무렵이 아니면 아주 이른 시간에 찾아야 풍파의 흔적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게다가 그 시간이래야 고즈넉함이 더해 과거로의 시간여행이 쉬워진다. 이런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던 터라 나는 동행한 후배의 등을 떠밀며 조반(朝飯) 전에 서둘러 도착했다. 그리곤 뒷짐을 지고 산책하듯 천천히 탑과 연못, 그리고 건물지와 회랑지를 한 바퀴 돌고나니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정문을 나설 때쯤엔 퍼진 햇살에 눈이 부셨고 부쩍 시장기가 돌았다. 식사를 할 요량으로 주변을 살펴보니 문을 연 식당이 보이질 않았다. 낭패다 싶었지만 별도리가 없었다. 이때였다. 길 건너 어느 허름한 집의 문이 열리며 아주머니 한분이 ‘팥칼국수’라고 쓴 입간판을 내놓는 거였다. 후배는 ‘팥칼국수’라는 것도 있냐며 의아해 했지만, 맛있게 먹어본 적이 있는 나는 입맛을 다시며 발길을 재촉했다.

 팥칼국수를 주문하자 ‘김치찌개도 되고 청국장도 맛있다’며 맨손으로 의자를 벅벅 훔치던 아주머니는 어서 앉기를 권했다. 그리곤 부리나케 주방을 향해 가면서도 달뜬 목소리로 연신 말을 건네며 유난히 곰살궂게 굴었다.
 잠시 후, 잘 익은 배추김치와 무생채, 그리고 콩잎장아찌랑 함께 나온 팥칼국수는 김이 펄펄 나는 게 입 안 가득 군침을 돌게 했다. “국산 팥이라 색깔이 아주 붉지는 않아요.” 난 그게 무슨 소린지 잘 몰라 건성으로 들으며 우선 국물을 떠 입에 넣었다. 아! 근데 이게 무슨 일이람! 팥 국물에선 살짝 쉰내가 나며 새큼한 맛이 입안에 확 퍼졌다. 순간 나는 옆에 서있던 아주머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음식이 입에는 맞는가요?” 좀 전과는 사뭇 다른 표정으로 걱정스레 묻는 말에 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곧바로 ‘아주 구수하고 뜨끈해서 좋다’며 젓가락으로 국수를 건져 한입 크게 먹었다.

 팥칼국수는 쉰 게 분명했다. 하지만 맛이 좋다고 흔쾌히 넘긴 가장 큰 이유는 이 정도라면 속탈은 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시골식당 아주머니의 작은 욕심을 채워주고 싶은 맘이 불현듯 들어서였다. 게다가 찬장이 냉장고를 대신하던 어려웠던 시절 자주 쉬던 음식이 아까워 식구들 모르게 잡숫던 어머니의 얼굴이 겹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덧붙이면 이런 음식을 팔면 어떻게 하냐고 까탈을 부렸을 경우 민망해 쩔쩔매는 아주머니의 모습도 감당해 내기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크게 한몫했다.

 “형! 본래 팥칼국수 맛이 이런 거예요? 계속 고개를 갸우뚱하던 후배는 조심스레 물었다. “신 걸 좋아해서 식초를 넣어 먹는 사람도 봤어” 내가 시치미를 뚝 따고 식초병을 건네자 기겁을 하며 자기는 그냥 먹겠다고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먹는 내내 후배의 얼굴은 찜찜한 표정이 역역했다.
 “이것 좀 먹어봐요. 따끈한 밥과 먹으면 기가 막힌데 밥 좀 갖다드릴까?” 장조림 한 접시를 가져와 상위에 내려놓던 아주머니는 은근하게 물었다. 그러나 칼국수 한 그릇을 거의 다 비운 우린 한사코 고개를 가로저었다.
 값을 치른 후, 식당 문을 나섰다. “어지간히 무던한 사람들이네, 조심해서 가요” 맛있게 먹고 간다는 말에 아주머니는 따라 나오며 혼잣말처럼 인사를 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논두렁에 마른 풀 타는 냄새가 고소하고 길가 매화나무 꽃망울은 탱탱 불어 금방이라도 벙글 듯했다. 어디선가 돌아갈 채비에 바쁜 겨울 철새의 깍깍대는 울음소리가 정겹게 들렸다.
 출발을 위해 자동차 시동을 걸던 후배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쉰 음식을 파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리고 형도 멀쩡한 사람을 속여 그렇게 바보 만들 수 있는 겁니까?” 격앙된 목소리로 계속 떠들어댔다.
 나는 그런 그에게 “아까 먹은 칼국수를 아직도 짊어지고 있냐?” 묻고, 난 이미 내려놓은 지 오래라고 짐짓 옛 선사(禪師)의 말투를 흉내 내며 그의 등을 도닥였다.
  아쉬워 바라본 미륵사지는 다시금 묵언 속 정진을 시작했고, 가타부타 말이 없는 몇 그루의 소나무는 선 채로 입정(入定)에 들어있었다.
 품 넓은 용화산이 ‘박한 끝은 없어도 후한 끝은 있는 거라’ 타이르며 우릴 감싸듯 편안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 계간 <한국작가>2012년 가을호에 게재된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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