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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도 '그 꽃'은 보일까    
글쓴이 : 조헌    12-11-04 10:51    조회 : 4,239
 
내게도 ‘그 꽃’은 보일까?

                                                                           조     헌

    내려 갈 때 / 보았네.
    올라 갈 때 / 보지 못한 / 그 꽃.    - 고은, 「그 꽃」全文

 얼마 전부터 등산을 할 때면 가끔씩 생각나 속으로 뇌는 시다. 짧은 서정시의 진수를 보여준다. 무심히 읽고 지나치기 쉬운 아주 작은 소품이지만 되뇔수록 지닌 뜻의 울림이 크고 여운이 길다. 산행(山行)과 같은 우리네 인생살이. 올라 갈 때는 오로지 정상만 보고 걷느라 주변의 어느 것도 눈에 띄지 않지만, 성취감을 맛본 후 하산을 할 때면 안 들리던 새소리도 불현듯 귀에 닿고 허겁지겁 스쳤던 길섶의 풀꽃들도 각기 다른 모습으로 눈에 들어온다.

 얼마 전 친구들과 소백산을 다녀왔다. 지금까지 이 산의 봉우리들은 거의 다 올라봤지만 유독 후미진 ‘국망봉’만은 교통이 불편해 번번이 놓쳤던 터라, 이번에는 아예 그 곳을 목표로 등산을 시작했다.
 큰 비가 온 뒤끝이라 골짜기 마다 흘러넘치는 폭포의 포말은 눈처럼 희고, 굉음을 내며 쏟아지는 물소리는 여름 더위를 저만치 몰아냈다. 게다가 빽빽한 수풀 사이로 찾아드는 햇살에 흩어지던 물보라가 무지개를 만들면 기막힌 선경(仙境)이 여기저기 펼쳐졌다. 첫길 산행인지라 길도 익숙지 않고 쉼 없이 계속되는 오르막길은 숨이 턱에 차 팍팍하기 그지없었다.

 “이젠 천 미터가 넘는 산은 무리야! 낼 모래 예순인데 적은 나이가 아니잖아!” 숨을 헉헉 몰아쉬던 한 친구가 계속 나이타령을 해댔다. ‘그래! 벌써 그렇게 됐던가!’ 돌아보건대 무엇 하나 끌끔히 해 논 것도 없건만 세월만 쏜살같았다. 댄스보다는 씨름에 가까운 게 인생이라는데, 어느 세대인들 자신들이 살아온 시간이 호락호락 했을까마는 우리가 보낸 시절도 녹녹치만은 않았다.
 다행이 6.25전쟁은 피했다 하더라도 휴전 직후 태어난 우리는 전쟁의 폐허로 인한 심한 궁핍 속에서 절약과 인내를 멍에처럼 등에 지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에 이어진 군부독재. 거기에 맞섰던 민주화 운동과 갖가지 사회혼란, 이 땅에 얼룩진 최근세사의 격동을 보고 또 겪어야 했다.

 사람은 세월 탓에 어차피 늙게 돼있지만, 부대끼는 현실의 고단함으로 더 빨리 무너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십대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에 가슴 졸이고 이십대는 무모한 열정과 갈망 때문에 상처받는다. 삼십대는 목표에 대한 회의와 좌절감, 사십대는 분주한 일상의 현기(眩氣)와 조급함이 할퀴며 지나갔다. 그리고 오십엔 안팎에서 몰려드는 숱한 책임과 중압감이 사정없이 훑으며 몰아쳤다.
 그러다 겨우 한숨 좀 돌리려 할 즈음, 이젠 사회적 소임을 다 했으니 일선(一線)에서 물러서 달라는 퇴직통보와 맞닥뜨리게 된다. 남의 사정으로만 여겼던 일이 홀연 내게 종주먹을 들이대는 것이다.
 한걸음 또 한걸음 얼마나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올랐던 산이었으며, 삶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견디는 거라고 몇 번이나 다짐하며 이겨낸 시간들이었던가.
 하지만 어쩌랴! 이젠 하산을 준비해야 한다. 자신이 올랐던 산이 높았던 낮았던, 또 그 산의 정상이 빛났던 초라했던 간에 천천히 산을 내려와야 한다. 지금부턴 정상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그 동안의 과정을 추억하며 바르게 하산하는 것이 책무임을 알아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지난 시간은 새로운 시작의 스승이라고 했다.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베풀고 비우고 느긋할 것을 다짐하며 종전과는 사뭇 다른 인생을 기획해야 한다.
 자신에겐 엄격해도 남에겐 자주 감탄하고 칭찬하며 용서하는 마음을 가질 일이다. 잘못은 바로 시인하고, 나이가 벼슬이라 우기지 않으며 무시당해도 무시하고 살아야 한다. 모든 것을 비우고 말석(末席)에 앉으면 비로소 세상이 제대로 보인다지 않던가.
 그리고 앞으론 ‘진격’보다는 ‘철수’를 준비해야 한다. 그저 많은 것을 순리에 맡기고 물러설 것을 염두에 두자는 말이다. 아직껏 내게 없는 것을 바라지 말고 지금 지닌 것을 누릴 줄 알아야 한다. 나이를 먹으면 얻는 것도 있지만 잃는 것이 더욱 많다. 따라서 ‘잃어버림’을 채비할 일이다. 그것은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라는 말이 아니라 순수하게 ‘잃어버림’을 받아들이라는 말일게다. 내 주변에 있던 사람도 재물도 의욕마저도 모두 떠나게 돼 있는 것이 시간의 비정함이다.
 부디 앞서 걱정하지 말 것이며 누군가에 의지해 행복하려 들지 말고 스스로가 즐거움을 만들 일이다. 내가 없어도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는 엄연한 현실을 인식하고 한결 더 여유로워져야 한다.

 이젠 나도 얼마 있으면 맡았던 배역을 끝내고 흔쾌히 무대를 내려서야 한다.
 그래 지금부터라도 나만의 시간을 좀 더 늘리고 나이에 상관없이 친구를 몇 사람 더 만들 것이다. 또 남이 하는 말에 자주 고개를 끄덕이며 아직까지 몰랐던 나무와 꽃 이름도 열심히 외울 것이다. 미혹함에 흔들리거나 덧없는 것들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세상의 모든 것들이 눈부신 깨달음의 재료임을 알아 그 감동에 매번 가슴이 뛸 수 있도록 하늘과 땅, 바람과 비에도 감사할 것이다.
 일렁이는 파도를 배경으로 힘차게 솟는 태양도 장쾌하지만, 온 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서서히 사라지는 저녁 해의 아름다움도 극진히 느끼며 살고 싶다.
 그럼 내게도 ‘그 꽃’은 보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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