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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견, 한 방에 날리다    
글쓴이 : 공인영    12-11-04 17:28    조회 : 4,603
편견, 한 방에 날리다
 
 
 
 “난 복싱이 정말 싫어”
  싫어하는 운동을 꼽으라면 망설임 없이 내뱉던 말이다. 스포츠라는 생각 이전에 먼저 모성(母性)이 개입하는 탓이리라.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안에서 끝장내라는 듯 사각의 링 안에 가두고 싸움을 부추기는 경기방식이 끔찍하다.
  멍들고 찢겨 피를 보고야 마는 이 난투극에 박수치며 열광하는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 안에 깊숙이 숨어있을지도 모를 잔인한 본성과 맞닥뜨린 것 같아 섬뜩하기까지 하다. 혹 그게 인간이 돌발적 과오를 범하게 하는 내재된 원인은 아닐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면 두렵기까지 하다. 상대를 괴롭힐수록 유리해지는 이런 경기에 도대체 왜 그렇게들 환호하는 걸까.
  TV를 켰다가 모처럼 복싱경기를 보게 됐다. 한 방송사가 2주에 걸쳐 기획한 예능프로에서였다. 몇 초마다 킬킬거릴 게 뻔하고 더군다나 복싱이라 관심 밖이지만 가족이 함께 하는 주말이니 내 맘대로 채널을 바꿀 수야 없질 않은가. 다행히 시간이 흐르면서 프로의 기획 의도에 호감도 갔고 그저 웃음만이 아닌, 두 선수의 인간적인 교감과 승부에 초점을 맞춘 방송은 뜻밖의 매력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탈북자로 어렵게 찾아온 이 땅에서 복싱을 시작한 열아홉 살의 최 현미 선수. 스폰서도 후원자도 없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세계복싱협회(WBA) 여자페더급(57.150kg 이하) 챔피언 자리를 지켜내고 있던 여자 선수다. 하지만 더 이상 방어전을 미루다간 타이틀마저 뺏길 절박함에 놓인 최 선수에게, 살 길은 오직 승리뿐인 상황이었다.
  그리고 쓰바사 텐쿠, 일본에서 건너온 상대 선수로 스물여섯의 나이가 무색할 만큼 앳됀 도전자였다. 챔피언보다 작은 체구가 싸움에 불리할 것 같은데도 꿀림이 없었다. 목소리엔 힘이 있고 따뜻한 말솜씨는 왠지 그녀가 차라리 문학도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게 할 정도로 처음부터 매력적으로 다가온 선수였다.
  이번 기회가, 챔피언에겐 복싱에 전념할 수 있는 안정된 발판이 될 것이고 도전자에겐 또 한 번 인내를 시험하며 타이틀을 쟁취할 수 있는 자리일 터였다. 경기는 첫 라운드부터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여자라는 이유로 얼마나 더 감각적이던지 두 선수가 주먹을 날릴 때마다 같이 움찔거렸고 정신없이 얻어맞을 땐 내 온몸도 덩달아 뻐근해지곤 했다. 때마다 잊지 않고 울려주는 땡! 소리가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그런데 우리 딸들과 비슷한 또래고 보니 더욱 ‘이놈의 몹쓸 경기’만 탓하는 중에도 왠지 그날은 이상하게 통증이 방향을 틀며 낯선 감정으로 날 이끌고 갔다.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기분에 살짝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라운드를 거듭하며 얼마나 치고받았을까. 선수들의 움직임은 점점 둔해져 몸이 마음을 따르지 못하기 일쑤였고 몸놀림은 뭉개지고 헛주먹질로 포물선만 그려댔다.
  그렇게 시간의 끝을 향해 몸부림치던 그들이 그만 서로 부둥켜안고 헉헉거리던 한 순간,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며 링 위의 장면들이 다른 그림들로 바뀌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의 억센 주먹질이 피비린내의 거친 동작으로만 보이지 않고 마치 너울거리는 무희의 슬픈 춤사위처럼 내 품으로 들어서며 서럽게 엎어지는 거였다.
  아, 저 모습은 목숨 걸고 싸우는 두 선수만이 아니라 인생의 복판을 헤쳐 가는 우리의 모습이구나. 하루하루 몸부림치며 살아내는 사람들이고 새벽이면 고단에 절은 채로도 어김없이 다시 현관문을 나서던 남편이구나 싶어졌다. 팽팽하게 당겨놓은 사각의 링이 날마다 누군가를 밟고 가야 하는 발밑의 슬픈 현실이라 생각하니 경기가 치열해질수록 거친 함성으로 주먹을 흔들며 억제된 울분을 쏟아내던 관중이나, 거실 한 귀퉁이에서 낯설게 목청 돋우던 남편의 심정을 조금은 알 것만 같았다. 그들도 경기를 보며 처절한 삶의 현장에서 신음하는 자신들을 발견한 걸까. 그래서 목청껏 응원하며 쓰러진 선수를 일으켜 세우고 나약해진 자신들도 다시 한 번 추스르려 했던 것일까. 남편도 그랬던 것일까...
   함께 했던 여섯 명의 연예인 패널들마저 두 여자 복서의 사투에 평심을 잃고 구석구석에서 눈물을 훔쳤다. 예전 같으면 난폭한 경기에 불편하게 찡그리고 있을 나도, 그게 ‘유일한 삶’인 그들의 입장과 타당성에 진실로 공감하며 가슴이 저려왔다. 그 밤으로 올라온 인터넷 글들을 보며 나와 똑같은 감정에 몸서리 친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다는 것에 새삼 놀랐다. 보고 듣는 게 갈수록 우울한 세상이지만 삶의 본질에 닫고자 노력하는 사람들 또한 줄지 않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린 두 선수의 승부가 뜻밖에 복싱에 대한 내 생각을 바꿔놓았다. 그리고 삶에 대한 태도와 자세를 조금 더 강화시켰다. 죽을 각오로 싸우던 두 선수의 경기는 ‘선(善)’ 그 자체로, 삶은 그 자리가 어디든 목표의 수치와 크기가 아니라 오직 최선을 다했기에 눈부신 것이었다.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어찌 아름답지 않으랴.
  경기가 끝난 뒤 패자의 방을 찾아간 승자의 포옹 또한 눈물겨웠다. 나는, 퍼렇게 멍든 눈두덩이가 붓고 일그러진 채로도 부끄럽게 웃던 두 선수가 아프면서도 사랑스러웠다. 그러니 다운을 뺏으며 승리를 거머쥔 최현미 선수나 온 힘을 다해 싸우고도 패배한 쓰바사 선수 모두를 나는 승자라고 말해주고 싶다.
 ‘상대가 이기면 상대의 집념이 강했던 것이고 내가 이기면 내 집념이 강했던 것이죠’ 라고 담담히 말하던 쓰바사 선수의 그 한 마디는, 결국 인생을 ‘하나’로 관통할 정직한 삶의 태도며 원칙이었다. 이보다 더 명쾌한 인생의 법칙과 위안이 어디 있을까.
  그날 밤, 그저 본능을 부추긴 몹쓸 싸움질이라고 외면해 온 복싱 경기가 오래도록 움켜쥐었던 내 편견 하나를 한방에 날려버렸다. 훅 하고!
 
                                                                                                            <2012.  현대수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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