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인손
조 헌
손톱을 깎다 덜 깎긴 것을 억지로 잡아 뜯자 손톱눈의 살점이 파이며 피가 배어나왔다. 오른손 검지였으나 별일 있겠나 싶어 휴지로 닦곤 그냥 두었다. 피는 바로 멈추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붓더니 다음날 아침엔 쿡쿡 쑤시기까지 했다. 미국으로 출발할 날은 점점 다가오는데 곪은 손가락이 낫지 않아 걱정이었다.
이번 미국행은 조금 특별한 거였다. 30년 가까이 교직(敎職)에 있다 보니 해외에 사는 제자들이 꽤 있는데, 뜻밖에도 LA에 거주하는 제자들이 합심하여 사은(謝恩)의 자리 겸 몇 군데 볼만한 곳을 모시고 다니겠다고 뜻밖의 제안을 해온 것이다. 처음엔 주저했지만 일을 주관하는 제자 치용이가 어찌나 극성을 떨며 권유하던지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붕대로 감은 손가락을 이리저리 아끼며 여행 가방을 챙겼는데 통증이 아직 그대로여서 몹시 신경 쓰였다.
출발을 며칠 앞두곤 소소한 염려로 치용이가 매일 전화를 해 댔다. “선생님께 배운 제자가 40명이 넘어요. 오시기만 하면 모두 반가워들 할 테고, 선생님도 흐뭇하실 거예요.”라며 줄줄이 주워섬기는 이름들 중엔 또렷하게 기억나는 사람도 여럿 있지만, 세월에 깎여 아슴푸레한 기억 속에 그저 흐리마리한 이름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름들 속에 20년이 넘었어도 어제 일처럼 분명히 기억되는 제자가 하나 있었다. 아직도 간간이 생각이 날 때면 쓰린 마음에 속이 짠한 U였다.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쉼 없는 노력으로 늘 좋은 성적을 유지했고, 야코가 죽어 말수는 적었지만 맡겨진 일은 언제나 제대로 매듭짓던 성실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운명은 줄곧 그에게 가혹했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으로 할머니와 둘이 생활해 왔는데, 지방에서 노동을 하며 생활비를 대던 아버지마저 당뇨 합병증으로 앓아눕자 아깝게도 대학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저것 방법을 생각해 보자는 내 권유에도 불구하고 당장 목을 죄는 생활의 어려움을 감당치 못한 그는 입학시험에 응시조차 하지 않았다. 졸업 후 그가 택시 운전을 한다는 얘기와 함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U와의 인연은 내가 담임을 맡던 해부터였다. 당시 고3 수험생이던 그가 연락도 없이 나흘째 결석을 하자 걱정이 된 나는 그의 집을 찾아 나섰다. 전화 통화마저 안 돼 무작정 주소를 들고 찾아간 곳은 동대문구 신설동 낙산 기슭이었다. 가파른 층계를 수도 없이 올라가니 아직도 서울에 이런 곳이 남아 있나 싶을 정도의 판자집들로 빼곡한 동네가 나타났다. 비 오듯 쏟아지는 땀을 닦으며 그의 집에 들어서자 관절염이 도져 꼼짝 못하는 할머니와 부끄러워 귀까지 붉어진 그가 몹시 놀라며 방문을 열었다.
“사는 게 이래요. 내가 이렇게 아파 저것이 학교를 못 갔네요. 죄송해서 어쩌지요. 예까지 오셨는데.” 낮인데도 침침한 방안에서 할머니는 말끝을 흐렸다. 이때 부엌 쪽에서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들렸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내가 들여다보자 주황색 비닐바가지를 수저로 젓던 U가 “날씨가 더워 설탕물 좀. 근데 설탕이 잘 녹지 않아서.......”라고 겨우 들릴 정도로 말했다. 나는 괜찮다며 바가지 째로 받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할머니께 말씀드리고 동네 중국집으로 그를 데리고 갔다. 자장면을 시켜 둘이 먹으며 가난과 절망, 그리고 아무리 힘겹더라도 마지막까지 쥐고 있어야할 희망에 대해 꽤 긴 시간을 이야기했다. 지금도 U를 생각할 때면 비닐바가지에 타준 설탕물과 허겁지겁 먹던 자장면이 어김없이 떠오른다.
내가 그를 다시 만난 것은 졸업한 지 10년쯤 지난 초겨울 늦은 밤이다. 시내에서 술을 잔뜩 마시고 택시를 탄 나는 행선지를 밝힌 후 이내 졸기 시작했는데 얼마나 지났을까 “선생님! 댁에 다 오셨어요. 이렇게 뵙게 되네요. 너무 죄송해요.” 놀란 내가 정신을 차리고 쳐다보니 U가 분명했다. 다급하게 그간의 소식을 묻곤 연말에 한번 보자고 연락처를 주었다. 그러나 해가 바뀌어도 소식이 없던 그가 이듬해 봄, 느닷없이 미국을 간다며 연락을 해 왔다. 할머니마저 돌아가시고 없는 서울이 이젠 싫고, 또 거길 가면 지금보다야 뭐가 나도 낫지 않겠냐며 작별인사를 했다. 갑작스러운 그의 통보에 나는 변변한 당부의 말 한마디도 제대로 해주지 못한 채 어정쩡히 보내고 말았지만, 항상 그의 소식이 궁금하고 걱정되었다.
미국에 도착한 날 저녁, 시내 한 식당에서 환영회가 있었다. 하지만 U는 오지 않았다. 내 눈치를 읽던 치용이는 “며칠 전 만났을 때도 오겠다했는데 웬 일일까요. 말은 안하지만 상한 얼굴이 무척 힘들어 보였어요. 낮엔 여기저기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엔 불법 운전을 한다던데, 거처마저 마땅치 않은 것 같아요.” 나는 그만 가슴이 싸하게 쓰려왔다.
한참 후 자리가 파할 즈음, U가 전화를 해왔다. 사정이 생겨 도저히 올 수가 없다는 그에게 나는 괜찮다는 말을 거듭하며 건강이나 잘 챙기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울먹이는 그의 목소리에 가슴이 꽉 미어졌다.
환영회가 있고 난 다음날부턴 제자들이 마련한 스케줄에 의해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옐로우 스톤, 그랜드 캐니언 등을 관광하고 라스베가스의 화려한 호텔들과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를 구경했다. 그리고 여유 있는 제자들과 바다낚시도 가고 야유회도 가졌으며 집에 초대되어 느긋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끝내 찾아오지 못하는 U를 생각하면 항상 명치끝이 아팠다.
서울로 돌아오던 날, 출국수속을 마치고 몇몇 제자들과 탑승시간을 기다렸다. 이때 치용이가 작은 비닐가방을 내게 건넸다. “아까 낮에 제 사무실로 U가 찾아왔어요. 뵙지 못해 너무 죄송하다면서 이걸 전해 드리라네요. 아마 종합비타민인 것 같아요.” 나는 아린 마음에 통화를 부탁했고, U는 한참 만에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정말 죄송해요. 죽을힘을 다해 열심히 살게요. 그리고 꼭 한번 찾아뵐게요.” 그는 소리를 내며 흐느꼈다. 할 말을 찾을 수 없던 나는 ‘그래그래’ 소리만 반복하며 흐르는 눈물을 맨손으로 훔쳐댔다.
목적지를 정해 놓고도 어떤 길로 가야 할 지 모르는 게 다반사고, 맞는 길이라 확신했다가도 샛길로 빠지기 십상인 게 인생인데, 신물 나게 불행했던 서울이 싫어 도망치듯 찾아온 그에게 이곳 또한 녹녹했을 리가 있겠는가. 장소만 바뀐 채 그의 고단한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인생은 경주나 시합이 아니다. 그래 누구나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게 마련이어서 굳이 남과 비교할 필요는 없다하지만, 그렇다고 천지 의지할 데라곤 전혀 없는 타국 땅에서 무작정 열심히 노력만 한다고 될 일인지, 돌아오는 내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고마운 제자들을 뒤로 하고 비행기에 탑승했다. 그 동안 쌓였던 피로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 때였다. 연일 먹은 술과 피곤함 때문인지 아직도 제대로 낫지 않은 생인손이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멀쩡한 손가락들 사이에서 유독 벌겋게 부어올라 쿡쿡 쑤시는 손가락을 내려다보며 부유한 나라, 잘 사는 친구들 사이에 끼어 고생하고 있는 U의 기운 없는 목소리가 귀에 쟁쟁했다
해뜨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지 않던가. 제발 U가 희망은 살아있는 동안 어느 한 순간도 우리를 버리지 않는다는 말을 꼭 기억하길 바라며 뻑뻑한 눈을 감았다.
* <수필과 비평> 2010. 7,8월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