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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뜻한 손    
글쓴이 : 조헌    12-11-17 00:32    조회 : 4,391
 
따뜻한 손

                                                                 조       헌

 2월 마지막 토요일. 종일토록 추적대던 비가 진눈깨비로 변해 쏟아지던 저녁, 외출을 준비하던 나는 도저히 나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문득 약속을 연기해볼까도 생각했지만, 친구는 이미 집에서 출발했을 시간이었고, 무엇보다도 내게는 이 약속을 미루지 못할 각별한 이유가 따로 있기에 서둘러 집을 나섰다.
 언젠가 공립중학교에 근무하는 친구가 ‘너의 집 근처 학교로 전근을 왔노라’며 연락을 해왔다. 반가운 마음에 조만간 한번 만나자고 말은 했지만, 번번이 짬을 내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뤄오던 터에, 막상 ‘4년 근무를 마치고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게 됐다’는 전화를 받고 보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 물론 그동안 다른 모임에서는 몇 번 만났지만, 그렇다고 내 무심함의 책임이 벗겨질 순 없었다.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 모르던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전근 가기 전에 꼭 만나야 된다며 서둘러 약속을 정하고 그를 채근했던지라 차마 내 쪽에서 먼저 약속을 미룰 수는 없는 거였다.
 바쁘지 않겠느냐며 몇 번이나 사양하는 친구를 굳이 불러내는 것은 저녁식사나 톡톡히 대접하며 ‘세월이 이렇게 빠른 거냐.’는 너스레로 그동안의 무성의를 사과하고, 소홀했던 우정을 만회해 보려는 속내였다.

 집을 나설 때는 번개와 함께 천둥까지 으르렁댔다. 약속장소를 실내로 하지 않고 학교 앞 큰길로 정한 것을 몇 번이나 후회하며 부지런을 떨어 조금 일찍 도착했다. 하지만 친구는 벌써 나와 우산으로 비바람을 이리저리 피하며 아랫도리가 흠뻑 젖은 채 서 있었다. 퍼붓듯 내리는 빗줄기에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한 우린 허둥지둥 식당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자리를 잡고 마주 앉은 후에야 그는 손에 들었던 두툼한 봉투를 내려놓으며 악수를 청했다. 마치 어제도 만났던 것처럼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환히 웃으며 내민 그의 손은 비에 젖었지만 따뜻했다. 항상 누구에게나 겸손하고 남에 대한 배려가 유별났던 친구다. 학창시절부터 보는 이들을 편안케 하던 그의 웃음은 아직도 여전했고, 나이가 들면서 생긴 눈가의 주름은 오히려 둥근 얼굴과 너무 잘 어울렸다. ‘어느 새 4년이 훌쩍 지나가 떠날 때가 되서야 이렇게 만나게 되었다’며 민망해하는 내 말에 만나지 못한 것이 어찌 너의 탓 만이겠느냐고 다시 웃었다.
 빗소리가 들리는 음식점 안은 아늑했다. 오랜만에 자리를 함께한 그와 난 모처럼 정겹고 흐뭇한 시간을 맘껏 즐겼다. 술을 곁들인 식사는 학창시절의 추억담까지 양념이 되어 맛을 더했고, 찬찬한 그의 음성은 분위기를 한결 훈훈하게 만들었다. 4년 동안을 남쪽지역에서 근무했으니 이번에는 다시 북쪽 끝으로 가게 됐다며 무엇보다도 출근시간이 지금보다 훨씬 짧아져 좋다는 것이다. 언제 한번 싫거나 나쁘다는 말을 그의 입에서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항상 그는 긍정적이고 모든 일에 감사하며 사는 착한 친구였다.
 술이 몇 순배 돌자 비가 그렇게 쏟아지는데도 들고 온 두툼한 봉투가 궁금했다. “아! 이거 별거 아니야. 실은 아까 조금 일찍 도착해 근처 문방구에서 산 사무용품 몇 가지야.” 우르르 쏟아 보여주는 것은 그의 말대로 자를 비롯해 풀, 지우개, 칼 등 10여 종의 사무용품이었다. 녹색 필통 속에는 각각 다른 색의 플러스 펜과 연필들이 가지런히 들어있었다.
 전근 가서 쓸 거냐고 묻는 말에 그는 손사래를 치며, 자기 책상으로 전근 오게 될 선생님을 위해 준비한 것이란다. “처음 학교를 옮겨 가면 당장 쓸 사무용품도 무척 아쉽거든. 별 것은 아니지만 조금만 성의를 갖고 준비해 주면 그 사람이 얼마나 고마워하겠어! 아마 내가 누군지 궁금해 하면서 두고두고 요긴하게 잘 쓰겠지. 어제는 책상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걸레로 서랍 속까지 말끔히 치워놨으니 이제 이 물건들을 책상 속에 놓아두기만 하면 떠날 준비는 모두 끝난 거지.” 해맑게 웃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상상해 보았다. 처음 낯 설은 학교에 전근 와서 어리둥절해 하며 자리를 안내 받아 책상에 앉았을 때, 깨끗하게 닦여진 서랍과 그 속에 가지런히 놓인 사무용품을 바라보게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그것은 분명 작은 배려가 만들어낸 한없이 큰 감동은 아닐는지?

 배려란 남을 염려하고 도우려는 진심어린 마음씨다. 어차피 세상을 독불장군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우리들이다. 살면서 느닷없이 닥치는 어렵고 벅찬 상황들이 얼마나 우리를 힘들게 하며 그럴 때마다 진정이 담긴 주변의 도움이 또 얼마나 간절했는가를 생각한다면 남을 위한 배려의 마음을 접고 살아서는 정말 안 될 일이다. 어찌 보면 이 세상 모든 이들은 셀 수 없이 많은 타인의 보살핌과 노고에 의해 얼키설키 존재하며, 서로서로가 긴밀하고 촘촘한 도움의 끈으로 엮어져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할퀴며 등을 지고 사는 요즘 세태는 우리의 마음을 한없이 무겁게 한다. 우리는 노상 세상에서 받는 도움이 큰 지, 아니면 내가 세상에 주는 도움이 큰 지를 생각하며 품 넓은 마음으로 남에게 베풀며 살아야 이 세상에 태어난 자신의 몫을 다하는 것은 아닐까.

 알프스 산을 등반하다보면 드문드문 방갈로를 만나게 된다고 한다. 그 방갈로들은 등반 도중 등산객들이 쉬거나 숙박할 필요성이 있을 만한 장소에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지어 놓은 것이다. 하지만 언제 들러보아도 늘 청결하고 잘 정돈되어 있으며 심지어 벽난로 곁에는 항상 필요한 양 만큼의 장작까지 비치되어 있다고 한다. 그것은 관리자가 있어서 청소하고 장작을 준비해놓는 것이 아니라 앞서 사용한 사람들이 뒷사람들을 위해 떠나기 전에 정리정돈을 말끔히 하고 창고에 있는 나무를 가져다 자기가 쓴 만큼의 장작을 난로 옆에 고스란히 보충해 놓고 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등산으로 지쳤거나 좋지 않은 날씨 탓에 등산을 중단하고 갑자기 찾아들어도 당황하지 않고 편안하게 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남을 위한 진심어린 배려야 말로 어찌 생각하면 가장 자기 자신을 위하는 길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인생은 순하지도 않고 공평치도 않으며 그래서 살아 내는 것이 그리 수월하지 않으나 이렇듯 남을 생각하는 따뜻한 사람들과 함께하므로 살아볼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따라 자기인생의 향기와 빛깔 그리고 무게가 달라지는 것 일게다. 분명 남을 위한 진정한 배려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에서 나온다. 그러나 그 겸손은 기실 자기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올곧게 세우는 일이다. 왜냐하면 진정 당당한 자만이 겸손할 수 있고 남에 대한 너그러움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너그러움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바른 쪽으로 이끄는 사그라지지 않는 힘이 되는 것은 아닐지.
 한때 전 세계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이슈 중심의 잡지 ‘타임(Time)’이 인간 중심의 잡지 ‘피플(People)'에 간단히 추월당했던 사례를 생각해 보자. 사람의 따뜻한 마음은 때로 우
리를 잡아 이끄는 이슈나 또는 무거운 사상적 담론보다 더 중요하고 큰 영향력을 우리에게 갖는 것은 아닐까. 역시 사람의 온기야말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밝히는 영원한 등불임에 틀림없는가 보다.

 포근하고 정겨운 시간을 보내고 음식점을 나서자 날씨는 거짓말처럼 개어 있었다. 봉투를 옆에 끼고 아쉬운 듯 연신 따뜻한 손을 흔들며 떠나는 친구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그의 결 고운 마음씨야말로 끝없이 샘솟는 내 마음의 약수터다. 그 시리도록 청정한 약수 한사발로 그동안 괜스레 뻗대며 살았던 내 삶의 갈증을 일순 녹여낼 수 있었다.
 나는 그런 친구가 곁에 있어 정말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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