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받을 수 있을까
조 헌
연전(年前)에 민들레의 효능이 널리 알려지면서 너도나도 그걸 캐기 위해 온 들판을 들쑤시며 다닌 적이 있었다. 위장과 신장 기능에 도움이 되고 빈혈과 간질환 치료에 탁월하며 심지어 노화까지 예방한다니 야단이 날만도 했다.
게다가 요즘엔 보기 드문 토종 흰 민들레가 노란 외래종에 비해 약효가 월등하다는 말이 돌자, 남의 집 정원에 핀 것까지도 버젓이 캐다 다툼이 벌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이 법석이 남의 일만은 아니었다. 몇 해 전부터 서울 근교에 거처를 마련하고 시골서 생활하시는 어머니께서도 불같이 일던 민들레 붐에 편승하신 거였다.
평소 술을 즐기는 아버지와 나를 위해 집근처 밭둑은 물론 건너 마을 산등성이까지 샅샅이 뒤져, 꽃이 핀 걸 뿌리째 캐온 민들레가 두 광주리가 넘었다.
어머니는 그 민들레를 물에 씻어서 뒤꼍 응달에 줄을 매고 쭉 걸어 말리셨다. 희고 노란 꽃이 그대로 달린 채 뿌리를 위로 하고 거꾸로 매달린 민들레의 모습은 자닝스러워 몹시 안쓰러웠다.
하지만 놀랄 일은 이 삼일이 지난 후에 벌어졌다. 속절없이 뒤집혀 말라가던 민들레의 꽃자리에는 어느 것 하나 예외 없이 막대사탕 모양의 하얀 홀씨 뭉치가 매달려 있는 거였다. 뿌리를 하늘로 향한 채 말라 죽어가면서도 기어이 씨앗을 만들어 허공에 날리려는 끈질긴 생명력에 감탄하는 한편, 인간이 한 모진 행동에 반항이나 하듯 내보인 꿋꿋한 그 의지가 왠지 섬뜩하게 느껴졌다. 바람이 불 때마다 솜털 같은 홀씨가 이리저리 흩어져 날렸다.
그 후, 난 이렇게 말린 민들레를 다려먹으며 과연 이 분노의 풀잎 속에 무슨 약효가 남아 있을지 자못 궁금했다.
유난히 추웠던 이번 겨울은 온 나라가 구제역(口蹄疫)으로 몸살을 앓았다. 심지어 국가적 재앙이라며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요즘이다.
지방도로 곳곳마다 구제역 확산 방지를 위한 방제 초소가 설치되어 소독약을 뿌려대지만 이 질긴 역병은 날개를 단 듯 빠르게 번져나갔다.
이미 삼백만마리가 넘는 가축들을 살처분했다는 뉴스가 우리를 놀라게 했다. 감염된 가축은 물론이지만, 그저 감염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감염지역 근방의 소나 돼지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거나 생매장 시켰다.
이 와중에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울린 엄마소의 이야기가 언론매체를 통해 전해져, 듣는 이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강원도 횡성의 살처분 현장에서 생긴 믿기 힘든 일이었다. 어떤 암소를 매몰하기 전, 안락사(安樂死)를 위해 주사액 석시콜린(Succinyl choline)을 투여했다. 소마다 각기 약물에 반응하는 차이가 있겠지만, 대개 이 주사를 맞은 소는 10초에서 1분 사이에 숨을 거두고 만다. '안락사'라고는 하지만, 살처분을 위해 공급되는 이 약은 엄밀히 안락사용 약품이 아닌 근육이완제다. 약물을 투여했을 때 모든 근육이 풀어지며 호흡근이 마비돼 심장의 박동을 정지시켜 가축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인데, 마취제를 병용하지 않으면 그 고통을 고스란히 느끼게 돼있다. 결국 주사를 맞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안락'하지 않은 셈이다.
이때 마침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송아지 한마리가 엄마소 곁으로 다가와 젖을 달라고 보채기 시작했다. 어미의 고통을 알 리 없는 송아지에게 엄마소는 의연히 젖을 물렸다. 10초에서 1분이 고작인 절박한 시간 속에서 갈수록 괴로워지는 엄마소는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듯 다리를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하지만 새끼를 위해 끝까지 버티며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주변을 비통하고 참담하게 만들었다. 3분이나 지나고 송아지가 젖에서 입을 떼자 엄마소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며 죽어갔다. 근육이완의 고통을 참아가며 새끼에게 젖을 조금이라도 더 먹이기 위한 엄마소의 모정(母情)이 얼마나 힘겨웠을까?
그런데 더욱더 사람들의 가슴을 후벼 팠던 것은 그 어린 송아지마저 살처분 대상이라 죽일 수밖에 없었던 정황이었다.
소가 원래 정이 많은 동물이라고는 하지만 영문을 모르는 송아지는 죽은 엄마소 곁을 계속 맴돌았고 결국 엄마소와 함께 살처분되어 나란히 묻히고 말았다. 이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사람들은 기적 같은 소의 모성애에 다들 얼굴을 돌린 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또 자식같이 기르던 가축들이 눈앞에서 죽임을 당하고 생매장되는 참극을 견디지 못한 농민들은 실신해 병원으로 실려 가고, 자기도 함께 묻어달라며 구덩이 속으로 뛰어들기도 했다. 또 살처분에 투입된 공무원들 중에는 올망졸망한 송아지들을 도저히 죽이지 못하겠다며 통곡까지 했다니 이 무슨 아수라의 현장이란 말인가. 가축뿐만 아니라 인간의 영혼까지도 매몰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할수록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살처분이 수반되는 구제역은 우리에겐 너무 가혹한 형벌입니다. 동물들을 살리려고 수의학을 배웠어요. 그런데 저승사자 노릇을 하고 있다니.......” 집단 매몰 현장을 지키며 끝내 말끝을 흐리는 한 수의사의 모습이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자연계에서 인간은 다른 생물보다 우월하지도 열등하지도 않다. 그저 동등한 관계에 있을 뿐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마치 하나의 나무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열매와 같은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인간은 행복해질 수 없다. 인간의 행복이란 우리 스스로가 자연의 일부가 되고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며 서로 조화를 이룰 때만 찾아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미 세상의 모든 일에 너무 자기중심적이 돼버렸다. 그 어떤 생명체도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대상일 뿐이라는 겁 없는 발상으로 사고하고 행동한다.
네가 있어야 나도 존재할 수 있다는 만고의 진리를 무시한 채, 오로지 인간만을 위해 모든 것을 거침없이 희생시키는 이 엄청난 욕심이 과연 용서받을 수 있을지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오늘도 뉴스에선 구제역 확산이 속보로 전해진다. 대체 얼마나 많은 가축들이 희생돼야 이 광풍은 끝이 날까.
이젠 민들레꽃이 지천으로 핀 논둑 어귀에 어린 송아지가 풀을 뜯고, 그 곁에서 엄마소가 천천히 되새김질하는 모습은 진정 꿈속의 풍경이 되고 만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