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을 뽑고 반죽하는 일은 고달프다. 언젠가 펄펄 끓는 물로 냉면가루를 익반죽하는 주방장의 모습을 훔쳐 본 적이 있다. 왼쪽 오른쪽, 허리를 뒤흔들며 사정없이 치대는 남자의 뒷모습이 마치 한 여자와 정열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장면 같아 낯이 뜨거웠었다. 간간이 고개를 들어 땀을 훔치던 그가 갑자기 뒤돌아서더니 “뭘 봐요!” 하며 웃는 것이었다. 석고처럼 단단해지는 반죽 덩어리와 허옇게 부풀어 오르는 손등이 두 눈에 들어왔다. 나는 진심으로 그 모습이 안쓰럽다고 느꼈다.
어느 날, 남편이 객지로 떠나고 주방장마저 잠적해 버리자 식당일은 일순간에 꼬여버렸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대략 난감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문을 닫을 순 없는 일, 나는 유유히 주방으로 들어갔다. 장갑을 끼고 기계를 작동하였다. 주방장이 가르쳐준 대로 레버를 내리면서 스위치를 살짝 누르니, 육중한 쇠뭉치가 반죽된 덩어리를 짓누르고 삼백 개가 넘는 미세한 분판 구멍을 뚫고 면발이 쫙 퍼져나가는 것이다.
끓어 넘치는 거대한 물꽃의 소용돌이 속으로 하얀 면발이 요동을 치기 시작하였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속으로 숫자를 세면서 긴 막대로 면 가닥이 뭉치지 않도록 휘저었다. 그러곤 순식간에 얼음물통으로 그것을 건져 옮기면 되는 것이다. 신기하다. 뜨거운 면발이 찬물로 들어가자 이내 찰기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이제 사리만 잘 치면 된다.
난 될 수 있는 한 주방장의 몸짓에 근접하여 흉내 내기로 작정하였다. 주먹크기만 하게 사리를 칠 것. 달걀을 쥔 듯한 형태로 한 움큼씩 잡아 동그랗게 말 것. 물기를 쪽 뺄 것. 그렇게 나뉜 면은 일 인분짜리 냉면그릇 속으로 다소곳이 안착이 되었다. 냉면을 뽑아내자 회심의 미소가 땀으로 흥건해진 등골 밑으로 퍼지는 기분이 들었다. 저 예쁜 냉면사리가 이 위태로운 식당의 주방에서 나와, 내 손님의 젓가락 위에서 춤추게 될 지 뉘라도 가히 짐작이나 하리야.
1986년 8월의 여름 밤, 처음으로 눈이 맞은 남자와 한데 몸을 섞고 말았다. 무엇이 사랑인지도 모르면서 그에게서 사랑을 언약 받았다. 맨몸으로 살림을 차리고 맨입으로 여러 날을 살았다. 비리고 어린 저 달이 몇 번이나 이울고 몰락하려 했지만 나는 남자의 방문을 꿋꿋이 지켰다. 먹지 않아도 그가 와주어 좋았고, 입지 않아도 그가 안아줘 행복했다. 귀가한 사내의 바지춤에서 피륙처럼 뻣뻣해진 면 부스러기들을 밤마다 꺼내 씹으며 그에게 입을 맞추곤 하였다. 뜨겁게 반죽되어 퍼지는 냉면가닥처럼 우린 하룻밤에도 몇 번이나 몸을 끓이며 약속하였다. 이 가난으로부터, 화톳불 같은 이 바닥으로부터 틀림없이 벗어나자고.
사랑의 달콤함에 길들기 전에 아기가 들어섰다. 명치를 에는 듯한 입덧이 지나고 다섯 달째 접어들던 오월 어느 날, 그는 서둘러 결혼식을 올리자고 하였다. 태어날 아기를 위해 해외는 못가더라도 가까운 곳으로 신혼여행을 떠나자고 속삭였다. 우동집 사장에게 결혼자금을 얻어 저렴한 식장을 물색하러 다녔다. 금세라도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배꼽 밑을 차대는 태아의 발꿈치를 손으로 쓸어내리며, 난 그렇게 불안한 청춘의 일기장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결혼식을 마친 뒤 패키지로 된 신혼열차를 타고 부곡하와이에 갔었다. 그곳에 내리자마자 문득 갈증이 났고 비로소 내 남자가 된 그이에게 냉면의 살얼음이 먹고 싶다고 말했다. 뱃속의 이 아이는 어찌 그리도 질기디질긴 면발을 좋아하는가. 가위의 날이 닿지 않은 뜨거운 냉면. 그래, 어쩌면 냉면은 뜨거운 것인지도 몰랐다. 냉면, 너는 눈물이고 기쁨이다. 아니 사랑이며 절정이다. 떨쳐내려야 떨쳐낼 수 없는 돈독한 믿음이다. 잽싸게 입 안으로 넣지 않으면 퉁퉁 불어터지고야 마는, 너는 무수한 관계의 덩어리다.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라고? 그래, 사랑은 눈물의 씨앗인지도 모른다. 세상엔 시간이 지나도 엉겨 붙을 줄 모르는 일회용 같은 사랑이 얼마나 많은가. 사랑이 뭔지 모르던 내가 우동가닥을 삶던 사내에게 ‘필이 꽂힌’ 것도 어쩌면 운명의 희롱일지도 모른다. 운명의 희롱이라니, 나는 또 내 운명을 가지고 놀지는 않았던가.
사람은 누구나 방황하기 마련이다. 사랑을 위해서도, 돈을 위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부단히 떠돌아다닌다. 한때 역마(驛馬)가 끼었던 우리네 삶도 그럴 테고, 연옥의 불길처럼 타오르는 저 뜨거운 화덕 앞에서 종일 냉면을 뽑는 주방의 남자들도 그럴 것이다. 내 손으로 직접 뽑아낸 면발이 아니었다면 어찌 그들의 삶에 내 하루를 비빌 수 있었을까. 월급을 송두리째 ‘잭팟’으로 날려버리고 사랑하는 처자와 본의 아니게 헤어진 젊은 주방장도, 하루를 끝내기 무섭게 남성전용 휴게방으로 달리던 H의 가불하는 삶도 십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남편은 지금까지 일편단심 손으로 치대 직접 뽑는 정통 냉면만을 고집해오고 있다. 질리게도 먹어온 냉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뽑아내는 주방장의 저 청동빛 땀방울을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이 지금 풀어헤치고 있는 냉면은 처음부터 차가운 것은 아니었으리. 홀로 도시의 골목길을 거닐다 붉은 깃발에 면발처럼 휘날리는 두 글자를 볼 때면 문득 그곳으로 빨려들고 싶어진다. 일인용 탁자 앞에 고개 숙이고 앉아 “냉면 주세요.” 라고 말한다. 주방장의 젖은 위생복이 목울대를 지나 복장뼈를 관통한다. 이제 우린 하나가 되었는가? 뒤돌아서면 또다시, 그래도 나는 땀으로 얼룩진 그 면발을 질겅질겅 되씹고 싶어지는 것이다.
- 문학사계, 2012년 겨울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