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의 초대
정모에
친구의 차는 겨울비 내리는 강나루의 꼬불길을 올라 가고 있고, 창밖으로 보이는 풍광은 날씨 특유의 회색도 아닌 꾸릿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첫 아이를 낳을 때 산고의 절정에서 내가 보았던 낡은 형광등의 빛바랜 어슴프레한 빛과 같다고나 할까?
양평. 지인의 화실을 찾아 친구들과 북한강 상류를 향해 다듬어지지 않은 옛길을 차는 흔들거리며 가고 있었다. CD에서는 신이 주신 목소리라는 조수미의 <기차는 여덟시에 떠나가고>가 흘러나오고, 난 전신마취가 시작된 듯한 나른함 속에서 창밖을 본다. 강물도 노래에 맞춰 흐르는 이 순간에 모든 게 멈춰버렸음 싶었다.
어머니! 살짝 눈을 떴을 때 차창 밖 능선에는 환히 웃고 계신 인자하신 어머니 모습이 아른거렸다. 창문을 만졌지만, 어머니 모습은 순간 스칠 뿐이었다. 몽롱한 가운데 비친 비현실 속의 영상을 떠올리며 먼저 가신 이를 떠올릴 때만 느껴지는 그런 느낌, 말하자면 내가 살아있다는 희열과 그리움으로 인한 비애에 잠시 혼돈스러웠다. 차속 여자 넷의 수다를 외면한 채 난 오래 전에 들었던 인생의 쓴맛에 관한 얘기가 생각이 났다. 어느 누군가가 깊은 우물에 빠져 흔들거리는 밧줄을 간신히 꼭 붙잡으며 절박하게 ‘누구 없어요? 살려주세요! 살려줘’하고 고함을 쳤더란다. 그 때 우연히 지나가던 꿀벌 한 마리가 소리를 지르느라 벌린 입 안의 목젖에 떨어뜨린 한 방울의 꿀, 그 달콤함을 음미하는 짧은 시간이 인생이라 하였다. 절대 삼켜버릴 수 없는 그 맛. 창가의 우수가 깃든 멋있는 장면들을 눈으로 새기는 동안에도 겨울의 강물은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산봉우리 능선의 옷벗은 나무들은 아는 척 한다. 멍석에 싸리빗 마른 가지들 펴놓고 유혹을 하나 숫자를 세어보지 도 못하게 차는 굴곡진 길을 지나쳐버렸다. 몇 번 본 적 있는 겨울의 낭만은 그렇게 스쳐가 버렸다.
나처럼 세월의 아쉬움과 초라함을 느껴 본 산하는 내게 말을 걸었다. 너가 겨울산을 찾아 올 때마다 내게 말을 건넸다고 했다. “그때의 넌 / 지금의 얼굴 표정이 아니었으며 / 싱그러운 봄날 같은 웃음을 웃고 있었다. / 인생에 일몰과 많은 낙엽이 떨어져 갈 때의 아픔을/ 때론 바람으로 또는 눈보라의 춤사위로 / 혹은 계절의 청아한 노래로 네게 미리 암시 했건만 / 젊은 시절의 너는 교만한 얼굴을 남기며 냉랭히 떠나가 버리곤 했었지” 라고.....그러나 난 또 너를 기다린다는 건 난 알고 있었다. 틀림없이 풀이 꺾여 다시 올 꺼라는 예감까지도. 꼭 한마디 하고 싶었어. ‘시간을 아끼며 귀하게 쓰렴. 화살은 이미 과녁을 향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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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실이다. 중년의 화가는 파이프의 엽초향이 어울리는 분위기를 지녔다. 새치 섞인 긴 머리를 묶고선 소박하고 선한 웃음을 늘 머금는다. 하트가 주제인 추상화를 보며 자유와 사랑, 신에게의 도전장 같은 호소력의 색채가 무엇인지 미미하게나마 이해가 됐다. 그의 그림에는 차마 걸음을 뗄 수 없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숨기고 싶은 과거를 안아주는 듯한 느낌이랄까, 그림에는 따뜻함이 배어 있었다. 언젠가 한 점 사서 거실에 걸어두고 싶어졌다.
화가는 피카소(영국 웰시테리어 견종)가 집을 나간 지 열흘만에 다시 돌아온 얘기를 자랑거리처럼 늘어놓았다. 박제라도 해놓고픈 모습의 개가 그림처럼 누런 잔디 위에 앉아있다. 거실의 벽난로엔 장작불꽃이 온기를 더하고 있고, 티 테이블을 자세히 보니 떡메판이었다. 운치있고 센스있는 화가의 면모가 드러나는 모습들이었다. 간결하게 차려진 음식과 포도주는 즐거운 담소에 여유와 잔잔한 감동을 더했다.
어머니가 무의식의 긴 병환에 끈을 놓고 가셨다. 긴 터널을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슬픔에 그들은 위로를 한줌씩 가슴속에 담아주었다. 고마운 친구들이다. 갈 땐 비가 오더니, 초저녁 이 되니 잔 눈이 몰래 내리기 시작해 우린 일어서야 했다. 눈이 많이 올 것 같았다. 갈 길은 조금 멀다.
오는 길, 창밖에는 겨울의 이른 밤에 산들의 모습은 잠들어 갔고 어머니 모습은 또 다시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는 쓰러지신 지 5년 반 만에 가족들에게 안타까움만 주고 떠나셨다. 그 긴 시간 속에서도 한 마디 말도 나눌 수가 없었다. 식물인간, 뇌동맥류 파열로 뇌의 절반 가까이 떼어낸 후였다. 길가에 쓰러지기 30여 분 전 어머니는 나의 둘째 딸과 마지막 통화를 하셨단다. 고구마 보내셨다고..... 뇌수술을 하고서 3일 이내에 운명할 가능성이 높다는 진단에 미국의 남동생들을 빨리빨리 오라 재촉했건만, 기약 없는 긴 시간들이 5년을 넘긴 것이다. 그 때부터 가족 모두가 환자가 되어 집안은 작은 전쟁터였다. 갑자기 혼자가 되어버린 아버지도 불안해서인지 치매가 심해졌다. 아버지와 두 남동생은 한국에서 미국으로, 미국에서 한국으로.
그 후 우울증이 왔다. 혈압, 불면에 왼쪽 머리가 아프면 유전인가 싶어 겁부터 나기도 했었지. 설픈 웃음이 나온다. 이젠 덧없는 삶에 대한 미련들일랑 버리고, 남은 생을 지금보다 이웃과 나누는 주님의 사랑을 나누고 싶다. 촛불, 내게 남은 심지의 한 치를 염려하기 전에 남은 불씨를 들고 밝음을 나눠줄 걸음을 나서보자. 있을 것이다. 내가 든 마음의 촛불이 여명이 되어 어두움을 밝혀줄 곳이.